태조 치세에 대한 기존 이해는 군신공치의 이념 위에 건국의 참여주체인 신료들이 태조의 왕권을 견제하고 압도했다는 선입관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실질적으로 각 사안의 해결과정에서 대간의 간언이라는 제도를 통해 신료들을 압도하는 왕권우위에 성공한다. 그것은 태조와 신료 간 간언이라는 의사소통 방식에 의해 대립과 긴장을 유도하는 특징을 보인다. 태조의 왕권이 신료의 견제에 의해 일정 수준 제한받았다는 외형상의 모습과 달리, 간언의 수용조차도 최종적으로 태조의 왕권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오히려 태조시기는 군주-재상-대간의 제도적 정립을 이루었고 언로의 기능을 담당한 대간이야말로 왕권의 안전장치로서 제도적 순기능 역할을 했다. 그 사례는 공신책봉, 경연, 왕씨제거 등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난다. 공신책봉·경연·왕씨제거 과정에서 발생한 태조와 신료 간 긴장성은 정치과정의 운영을 둘러싼 주도권의 방향과 함께 조선왕조의 의사결정과정이 지닌 합리성을 도출하는 기제로서 공론정치의 틀을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