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19세기말 한국에 자유주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수용되어, 어떤 기능을 했으며, 또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개화파 사상가들은 '자유주의'를 왜 '수용'하려고 했을까, 어떤 생각으로, 낯선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려고 했을까. 이어 자유주의를 과연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로 수용했는가. 아울러 자유주의는 개화기 내지 구한 말에 어떤 사회적 기능을 했으며, 또 어떤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개화기 지식인들에게 '자유'와 '자유주의'는 새로 접하게 된 서구 '문명'의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되었으며, 현실적으로는 '문명' 서구 국가들이 보여주는 '부국(富國)'을 실현할 수 있는 방책으로 여겨졌다. 자유주의 수용에 관해서는 '개인' 관념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는데, '개인'이라는 용어 자체는 1904, 1905년 무렵부터 쓰여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유주의'라는 용어 역시 1905년 이후에 정착된 것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느 정도까지 자유주의가 구현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적일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 수용에서는, 가장 필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한 측면부터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전제군주(왕)의 권력에 대한 제한'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까지 민,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하기 위해서 군권의 제약을 주장했다고 해석해온 반면, 필자는 군주의 권한을 제약하기 위해서, 오히려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했다는 식의 해석을 시도해보았다. 그런 의식은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제한정부 이념, 즉 입헌정체(입헌군주제) 주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민, 인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주장은, '군민공치' '군민동치'라는 정치형태를 표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민, 인민은 아직 '개인'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으며, 집합적인 성격이 농후한 범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민권'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기 사상가들에게서 민이나 인민에 대해서 곧바로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주장은 나을 수 없었다. 역시 '계몽'과 '교육'이 필요하며,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 시대의 상황과 성격상, '개인'으로서의 자각과 독립이라는 과제는 점차로 밀려나게 되었다. 냉혹한 국제정치(각국교제, 외국교제) 현실 속에서는, '민족'과 '국가' 같은 범주가 더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개인'의 존재는 가리워지게 되었다. '개인'의 유예와 이월이라 해도 좋겠다. 그와 더불어, 한국에서의 자유주의의 온전한 발현 역시 어쩔 수 없이 훗날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