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5월15일 위엔스카이(袁世凱)는 일본이 요구하는 21개의 항목을 받아들임으로써, 중일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의 첫 조항은 독일에 이어서 일본이 산똥(山東)지방에 대한 특권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일 간의 불평등 조약은 대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효력이 지속되어서, 1922년에 이르기까지도 폐기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해 〈동방잡지(東方雜志)〉에서는 조약 폐기를 요구하는 문장이 발표되기 시작한다. 이제 중국인들은 국제 조약으로 상징되는 국제법 체제가 힘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임을 새삼 인식하면서, 여기에 제국들 간의 경쟁뿐만 아니라 약소국에 대한 이해까지도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 사회의 경쟁 체제에서 가장 핵심적 구성개념은 바로 민족국가였다. 위의 중일조약 폐지에 대한 요구가 부상하기 이전부터 〈동방잡지〉에서는 이미 국가와 그 내부의 제도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된 바 있었고, 그 가운데 국가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이론과 개념들은 오사를 전후해서 대량으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그중 까오라오(高勞)는 역사 상 세계 지배의 형식을 분석하면서, 적자생존의 경쟁적 진화 논리를 대신해 "약자의 문화주의 지배(弱者之文化主義支配)"라는 개념을 제기한다. 그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이러한 "약자의 문화주의 지배"의 예로 들면서, 자본주의와 민족국가가 가지고 있는 독점에 대한 욕망과 그로 인해 정당화되는 폭력적 억압성을 비판한다. 이어서, 리스정(李石曾)은 크로포트킨의 호조론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경쟁 진화의 논리와 다시 대립을 이룬다. 그가 번역한 크로포트킨의 호조론은 풍부한 역사적 고증의 사례를 통해 진화가 경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 협력에 의해서도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주장 또한 어떤 강압적 체제로서의 국가를 부정하고, 그 대신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연합체를 옹호한다. 나아가 이러한 반국가적 이론의 정점은 주로 션옌삥(沈雁冰)에 의해 소개된 바쿠닌의 무강권주의였다. 이 주의는 "경찰과 형법"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강제력과 권력행위 자체를 전면 부정하고, 국가의 폐지를 위해서 폭력의 사용도 불사하는, 따라서 국가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부정의 태도를 취한다.
이렇게 국가의 지배를 폭력으로 간주하여 부정하는 이론들에 대한 〈동방잡지〉의 일련의 소개는 당시 중국의 정치 체제 혼란이라는 배경 속에서 담론의 구조 상 공화 체제를 주장하는 오사 주류 담론들과 대립하며 대안 담론들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가 가지는 본질적 폭력성이 경쟁 진화의 논리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하여, 그 대안으로 호조론과 상대주의 논리를 통해 국가라는 권력 형식을 넘어서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공화 체제를 옹호하는 오사의 분위기 속에서 분명 주류의 분위기 속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세계 질서 속에서 중국이 처해 있던 상황과 국가의 개인과 지역에 대한 무단적 지배에 대한 반감에 의해 공론장에서 점차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적 탐구는 실제 〈동방잡지〉의 이후 편집 경향 속에서 국가의 틀을 넘어 세계주의적 관점으로 확장되면서 기존 열강 중심의 세계 인식보다 약소국이나 지역 단위의 사고를 강조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국가 단위를 넘어 세계 인민들 간의 문화적 연대와 실천을 상상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이 시기 〈동방잡지〉의 세계주의 경향이 드러내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