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동안 한국 정당 정치는 이념적으로 대표되는 공간이 협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최근 들어 주요 정당 간 이념적 차별성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다양한 관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변화의 계기는 1990년의 3당 합당이다. 3당 합당의 1차적 동인은 각 정당을 이끌던 정치 지도자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1988년 총선 결과 여소야대의 상황 속에 어려움을 겪던 노태우 대통령과 차기 대권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한 김영삼, 그리고 소수 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집권세력에 참여하려한 김종필의 욕구가 일치점을 찾은 결과였다. 그러나 3당 합당이라는 정당 구도의 재편은 이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이후의 정당 정치의 전개 방향을 변화시켰다. 아마도 3당 합당에 따른 즉각적인 정치적 결과는 비호남 연립 대 호남이라는 지역구도의 강화일 것이다. 평민당을 제외한 3당의 합당은 현실 정치적으로 호남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당 합당은, 그 이후의 정치적 상호작용을 통해, 한국 정치의 맥락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속성을 강화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3당 합당과 반대 세력들의 대응, 그리고 양자 간의 상호작용이, 각 정당의 이념적 차별성의 강화라고 하는, 3당 합당 당시에 의도하지 않았던 정치적 결과(an unintended political consequence)로 이끌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