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유사 이래 독도명칭이었던 「于山島」「子山島」「所謂于山島」「石島」「獨島」의 생성배경에 관해 고찰하였다. 첫째로, 지명을 명명하는 사람이 어떠한 업무에 종사하였는가, 울릉도에 거주민이 거주하였는가, 울릉도를 수토한 수토사가 단기간에 수토한 정보에 의거하여 지도를 그렸는가에 따라 지도의 정확성은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둘째로, 고대의 우산국시대와 고려의 우산성시대에는 울릉도에 거주민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동쪽바다인 동해에는 울릉도와는 다른 별도로 또 한 개의 작은 섬이 존재했다고 하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초기와 중기, 즉 조선조정이 울릉도를 비워서 거주민을 관리했던 공동정책 시기에는 이전 시대의 영토인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동해에 鬱陵島와 于山島라는 두 개의 섬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셋째로, 17세기 한일간에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때 안용복은 실제로 울릉도는 물론이고 子山島(于山島-지금의 독도)의 존재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그려진 지도나 기록은 매우 정확하다고 하겠다. 넷째로 안용복 사건이후 동해 도서에 대한 영토의식이 높아져서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한 수토가 빈번하게 행해졌다. 조선은 공도정책을 실시하면서도 2,3년에 한번정도로 울릉도에 수토사를 파견하여 섬을 관리했다. 이들 수토사들은 오늘날 독도에 해당하는 우산도를 실제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도를 잘못 그려서 잘못된 지도정보를 후세에 남겼다. 다섯째로, 근대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조정은 울릉도 개발의 일환으로 수토사 이규원을 울릉도, 독도에 파견했는데, 이규원은 오늘날의 독도인 우산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규원은 이전 시대의 수토사들이 남긴 잘못된 정보에 의한 「所謂于山島」이 오늘날의 독도인 우산도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所謂于山島」는 오늘날의 「댓섬(竹島)」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울릉도에 거주해던 도민 중에는 울릉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독섬(독도)」까지 조업을 행했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고종황제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영토에 대한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勅令四一号」를 발령하여 鬱島郡의 범위로서 「鬱陵全島, 竹島, 石島」를 명확히 했다. 칙령41호에는 울릉도 거주민의 경험에 의거한 「돌섬」을 한자어로 표기하여 「石島」라고 명명했다. 그 이후 울릉도에 거주하게 되었던 개척민의 80%에 해당했던 전라도출신들에 의해 「돌섬」을 「독섬」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는 다시 문서상으로 「獨島」라고 호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시대의 우산도는 근대에 들어와서 「石島」와 「獨島」라는 호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本硏究は古来の獨島名稱である「于山島」「子山島」「所謂于山島」「石島」「獨島」の生成背景について考察したものである。第一に、地名の命名者がどのような業務に從事していたか、鬱陵島に人が居住していたかどうか、搜討使が短期間に搜討した情報によっていたものかどうかで各各正確度が違う地圖を描いたことがわかる第二に、古代の于山國と高麗の于山城時代には鬱陵島に居住民がいたので東海に鬱陵島とは別のもう一つの島が存在したという正確な情報をもっていた。朝鮮初期と中期、鬱陵島の空島政策時期には前の時代の領土認識をそのまま繼承して東海に鬱陵島と于山島という二つの島の存在を認識していたのである。 第三に、17世紀に安龍福は實際に鬱陵島は勿論のこと、子山島(于山島)の存在も明確に確認していたのである。第四に、安龍福事件以後、東海の島嶼についての領土意識が高められて鬱陵島と于山島に対する搜討が頻繁に行われた。空島政策のなかに大体2-3年に一回ぐらい鬱陵島を搜討した搜討使たちは于山島を實際に確認していなかったので間違った地圖を残した。第五に、近代になって鬱陵島開発の一環として搜討した李圭元も今日の独島である于山島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かし以前の掃討使たちが残した間違った「所謂于山島」が今の獨島である于山島ではなく、今日の「竹島」であることを明確にした。鬱陵島の居住民の中には鬱陵島から見られる「トクソム(독섬)」まで出かけて操業をしていたこともある。高宗は日本からの侵略を防止するために勅令四一号をもって鬱島郡の範囲を「鬱陵全島、竹島、石島」と明確にした。勅令四一号には鬱陵島の居住民の經驗に基づいて「トルソム(돌섬)」を漢字語で表記して「石島」と表記したのである。鬱陵島の居住民はその後、開拓民の80%に当たる全羅道出身の人たちによって鬱陵島の人々は「トルソム(돌섬)」を「トクソム(독섬)」に変えて呼稱することになった。この「トクソム(독섬)」は再び文書上には「獨島」と変えて呼稱することになった、このようにして「石島」と「獨島」の呼称が生成された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