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대 사람인 이형상이 쓴 『강도지』 風俗 條에 의하면 강화 갑곶에 성황당이 있었으며 그곳을 중심으로 성황제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성황제는 관의 허락하에 무뢰들이 주도하여 벌이는데 앞뒤로 창검, 군기를 들고 호위하며 주변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기예를 보이고 음식과 돈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갑곶성황제가 벌어지는 갑곶은 조운선이 지나는 길목에 있고 육로상으로도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直路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렇듯 갑곶은 강화에서 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갑곶에서 배를 타고 염하를 따라 내려가면 손돌목이라는 위험한 여울을 만나는데 이 때문에 배를 타고 염하를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갑곶에 뱃사람들을 위한 神堂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갑곶성황제는 12월에서 다음해 정월보름에 이르는 기간동안 행렬이 주변 마을을 돌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갑곶성황제가 신년의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축제를 벌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물이 쓰이기 때문에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강화의 주민들은 경작이나 장사를 통해 재물을 모으기가 힘들었고 오히려 정부의 조세미를 수송해주는 대신 받는 선가(船價)를 통해 생활을 유지해왔다. 이러한 선가(船價)는 강화도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갑곶성황제를 진행하는데도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갑곶성황제에는 이러한 선가(船價)의 비중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지역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기예를 보여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에는 이들을 이용하여 갑곶성황제 행렬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갑곶성황제는 갑곶이 가지는 지리적 특성과 강화의 경제력을 배경으로하여 형성된 항해상의 안전을 기리는 대규모 축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