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에 유포한 「표류기(漂流記)」와 메이지이후에 여러 번 편찬된 『표류기집(漂流記集)』에 수록된 「표류기(漂流記)」와의 사이에는 그것을 「표류기(漂流記)」로서 평가하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표류사건에 관해서 사료가 어떤 시점에 처음에 「표류기(漂流記)」로 읽히게 되었는지에 유의하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표류기록(漂流記錄)」과 「표류기(漂流記)」의 명확한 구별은 쉽지 않지만 「표류기록(漂流記錄)」으로 유지해야 하고 때로는 그것을 「표류기(漂流記)」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 점에 유의하면서 근세 일본인의 조선표류기를 통해서 에도시대 일본에 남겨진 「표류기(漂流記)」의 특징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최근, 근세후기 일본의 특징 중 하나가 「표류의 시대(漂流の時代)」라고 지적되었지만, 그 경우의 주된 관심은 구미(歐米)와의 관계에 초점이 있다. 즉, 18세기 당시 일본과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갖지 않고, 외교루트에 의해 해당지역의 정치정세와 문화의 상태를 알 수 없는 경우에 표류민을 통한 정보수집에 관심이 모아졌다라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한편, 근세 동아시아 특히 조선·일본·중국의 세나라 사이에서는 표류민의 상호무상송환제도(相互無償送還制度)가 기능하고 있었고 유독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는 표류기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즉, 「듣고 쓰기(聞書)」형식의 「표류기(漂流記)」는 정식 외교관계가 없는 지역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갈망한 지배권력과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관여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반대로 말하면, 근세에 있어서 일본과의 사이에서 표류민상호무상송환제도(漂流民相互無償送還制度)가 기능한 지역에 관해서는 「듣고 쓰기(聞書)」형식의 「표류기(漂流記)」가 만들어지는 것은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표류기록(漂流記錄)」이 널리 「표류기(漂流記)」로 폭 넓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많은 경우 근대 이후에 일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