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의 성격을 지닌 근대의 전쟁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발생시켜, 공동체 구성원에게 커다란 고통과 슬픔으로 각인되었다. 전쟁이 지속적으로 '적(敵)'을 설정하는 과정이라면,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인은 커다란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했다. 혼란이란 감성의 동요는 지식인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났다. 일제시기 말 전쟁에 동원된 엘리트 청년인 학병(學兵)은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의 국가인가, 왜 그들의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어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요구 받는가 등의 물음에 직면했다.
조선인 학병은 학생 출신으로 군인이 돼서 일제의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훈련기간의 면제 및 장교로의 전환 등의 회유책을 제시했다. 아울러 다양한 계층의 조선인을 통해 이들의 학병 지원을 독려했다. 특히 학병을 대상으로 한 이들 조선인의 '격려'는 이론과 논리보다는 '감성 동원'의 성격을 지녔다. 특히 혈연관계인 부모를 대신해서 일제는 학교와 군대 및 사회의 '선배(先輩)'를 학병 동원에 적극 활용했다.
전시체제기 선배란 용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들 선배는 학병 동원을 격려하기 위해 조선 각지와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들 가운데 1943년 11월 일본에 파견된 '선배격려단'이 주목된다. 일제는 친일파 가운데 학생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선배'인 최남선, 이광수, 김연수 등을 파견했다. 이들의 동원 논리는 강연회와 같은 공적 공간과 숙소와 같은 사적 공간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1945년 8월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귀환한 학병은 수기, 회고록 등을 통해 살아남은 기쁨과 함께 귀환하지 못한 동료 학병에 관한 슬픔을 표현했다. 그런데 점차 이들의 기억 내부에는 균열이 나타났다. 탈주에 성공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학병과 일제의 전쟁에 동원된 학병의 전쟁 동원에 관한 기억이 달랐다. 아울러 학병 동원에 앞장선 '선배'들은 전쟁 협력 활동이 일제가 아닌 조선 민족을 위한 행위였다고 '변명'했다. 1970~80년대 기록을 통해 학병은 비극의 원인이 일본제국주의 탓으로 강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학병 동원에 적극나선 '선배'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이러한 학병의 기억은 민족공동체의 슬픔을 내면(內面)에서 직시하지 않음으로써, '친일파 청산'이란 분노와 치유 과정을 소홀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