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또 볼라뇨의 유작 『2666』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국가적 시각을 바탕으로,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árez)에서 -소설에는 산따 떼레사(Santa Teresa)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일어난 여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설화한다. 시작과 끝이 미국-멕시코 국경도시에서 만나는 '뫼비우스의 띠' 구조를 통해서 소설은 이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199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초래한 구조적 결과로서 지구촌 각지에서 나타나는 세계화의 위기를 상징하는 예임을 암시한다. 본 논문은 이 소설이 살인의 현장을 재현하고 이 비극적 상황에 어때한 해결책도 보여주지 못하는 무능한 지식인을 묘사함에 있어 '반복'의 기법을 사용한 것에 주목한다. 볼라뇨는 '반복'의 서사전략을 통해 공포와 무의미를 소설의 주된 이미지로 만들면서 산따 떼레사의 연쇄살인사건이 단순한 범죄와 부패를 넘어서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폭력과 공포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로 형성된 침묵이야 말로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놓인 국경지대의 진정한 위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위기는 근대세계가 재생산하는 '악'의 또 다른 형태로서, 결국 도시는 괴물과도 같은 유기체가 되어간다. 이렇게 볼라뇨는 소설 전체에 묵시론적, 디스토피아적 세계인식을 형상화하는 한편 동시에 유토피아적 열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악'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이에 맞서는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