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백겸 韓百謙과 유형원柳馨遠은 매우 깊은 성리학적 토대를 갖고 있었으며 두 사람 모두 대체로 ① 도기일체론적道器一體論的 기일원론氣一元論- ② 리理의 수용(퇴계학의 수용)- ③ 도기일체론적道器一體論的 리일원론理一元論의 단계를 겪었다(한백겸의 경우 뒤의 두 단계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음).
둘째 이러한 도기일체론적 리일원론은 리理라는 원칙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이것을 구체적으로 현실 속에 구현할 수 있게 하는 하려는 점에서 실학의 전개를 위한 철학적 토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 퇴계학은 실학의 철학적 토대 형성을 위한 매개적 기능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 자체가 실학의 철학적 토대가 된 것은 아니다. 도기일체론적 기일원론(화담적 경향)이라는 테제가 선행하여 있었고 여기에 다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이라는 안티테제가 있었고 양자가 지양, 종합되어 최종적으로 도기일체론적 리일원론 철학(정명도적 경향)이 형성되어 이것이 실학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셋째 유형원에 대한 퇴계학의 영향을 강조하면서 더불어 "실리實理"를 『반계수록』의 철학적 토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자체로서는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리는 송대 이래 성리학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것이다. 다만 유형원에게서 실리는 자연은 물론 인간의 윤리, 국가제도의 모든 측면까지 확대된, "도기일체론적 실리"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유형원에게서 실리는 모든 현상 속에 강력하게 구현되고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주자학과 한백겸·유형원 실학의 차이는 흔히 생각하듯이 리를 구체적인 현실의 제도로 구현하느냐, 않느냐의 차이는 아니다. 기氣에 의한 현실적 제약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의 차이에 달려 있다. 주자 역시 조세개혁론 정도의 구체적인 국가제도 개혁을 생각하였으나 정전井田의 이상에 입각한 토지개혁은 현실적으로 시행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리·기에 주목하면서도 기의 제약성을 강하게 의식하는 리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입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한백겸과 유형원은 국가제도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인 토지개혁부터 실현하여야 하다고 생각하였다.
다섯째 도기일체론적 리일원론이 그 자체로서만 실학을 낳은 것은 아니다. 이에 선행하여 여말선초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주례周禮』에 입각한 총체적 국가제도 개혁론의 흐름이 선행하여 있었고 사림파 내에서도 여러 개혁론이 제기되었다. 이런 학문을 흐름이 선행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실학이 가능하였다.
여섯째 보다 근본적으로는 16세기 전반 이미 조선초기의 제도가 파탄된 상황에서 임란과 호란에 따른 전국토의 황폐화와 인민의 참상이라는 현실과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욕구가 강하여져서 실학을 탄생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체적 현실의 여러 모순과 문제가 먼저 있고 이에 대한 강한 개혁 의지가 생겨났으며 이런 가운데 새로운 철학적 모색이 치열하게 진행되어 새로운 철학이 정초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정합적·총체적으로 국가제도 개혁론을 추구한 것이 바로 『반계수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