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천진암과 주어사 강학회는 기해년(1779) 겨울에 있었으며 이벽이 참여한 것은 천진암에서 주어사로 옮겨간 이후의 “주어사 강학회”이다. 주어사 강학회의 성격은 유교적인 것이었으며 이벽이 참석한 뒤 유교 경전과 서교의 관련성을 토론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정약용이 주어사 강학회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일단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1784년 3월 말엽 이벽은 이승훈을 만나 북경에서 세례 받은 사실 등을 전해 듣는 한편 서교 관계 서적들을 건네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윤3월까지 이벽은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고나서 대략 4월부터 주변의 인물들에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리하여 이 정약용은 4월 15일에 이벽으로부터 西敎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셋째 1784년 연말 무렵 일종의 서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대략 을사년(1785) 새해를 맞이하면서 서교 집회가 시작되었고 3월 형조에 적발될 될 때까지 모임이 여러 차례 있게 되었다. 정약용은 1885년 3월 형조에 의해 적발된 모임에는 참석한 것으로 여겨진다.
넷째 정미년(1787) 12월 성균관 앞 泮村에서 있었던 서교 모임에 정약용이 참석하였고 홍낙안은 이 모임에 대하여 다음해(戊申年) 人日製(1월 7일)에서 국왕에게 폭로하였다. 정약용은 1789년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이 뒤에도 1791년 辛亥敎案이 일어날 때까지는 西敎에 대하여 열성적이었다.
다섯째 辛亥敎案은 이 해(1791) 9월 초순 서울의 홍낙안에게 탐지되어 중순 무렵부터 문제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 이후 정약용은 이후 西敎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여섯째 대략 乙卯年(1795) 윤2월 중순 무렵부터 본격화된 주문모 신부의 선교 활동은 5월 초순 한영익에게 탐지되었고 5월 9일 무렵 한영익이 이석(이벽의 동생)에게 알렸고 이석은 5월 10일 무렵 채제공에게 알렸으며 이에 5월 11일 채제공이 정조에게 보고하여 바로 당일 주문모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주문모 사건(을묘교안)과 금정찰방 부임을 계기로 정약용은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First, the Confucian Workshop in Ju-eolsa temple was held in the winter in 1779 and Jeong, Yak-yong did not take part in the workshop.
Secondly, Jeong, Yak-yong first heard about Catholic teachings on April 15th in 1784.
Thirdly, approximately at the end of 1784 the Catholic community was made in Seoul and Jeong, Yak-yong participated in the community. But because of the purge of Catholicism at the beginning of 1785, the community might stop the activity for the time being.
Fourthly, approximately at the end of 1787, the Catholic community in Seoul began the activity again and Jeong, Yak-yong took part in the activity.
Fifthly, after the purge of Catholicism in 1791, Jeong, Yak-yong abstained from the active participation in the Catholic community Sixthly, Jeong, Yak-yong left the Catholic community completely after the Catholic purge in 1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