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가족법을 제도화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등장한 ‘사생아’는 “일부일처 법률혼”을 위반한 관계의 산물이자, 동시에 “아버지가 없는” 아이에게만 붙여지는 법률적 신분이었다. ‘사생아’라는 호칭은 그들 존재에 대한 단순한 언어적 표현이기 보다는, 국가가 그어 놓은 선을 넘은 자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낙인’이자 존재론적 ‘형벌’과도 같았다. 여기에는 근대 일본이 구사한 가족 정치학, 나아가 국가 정치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더욱이 사생아 문제는 근대 가족법이 구사한 젠더 정치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아버지의 ‘핏줄’만이 ‘정상성’을 획득함으로써, 그로부터 배제된 존재는 비정상적이고 불온한 존재가 된다. 사생아를 낳은 여성 또한 “불건전”한 섹슈얼러티를 발산하는 여성으로 아이덴티파이 되어, 사생아의 존재는 그를 낳은 어머니에게는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와도 같았다. 국가가 공인하지 않는 관계, 그 선을 넘은 자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아이와 그의 어머니만의 몫이었다.
이러한 ‘사생아’라는 주변화 되고 이질적인 타자를 구성하는 일본의 가족법은 식민지 조선에 거의 그대로 이전되었다. 제국 일본의 식민지 정치학이 작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법제화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법률혼과 남계혈통에 의한 ‘가족’ 구성의 원리는 한국인의 중요한 삶의 원칙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 핏줄”, “자기 자식”에 대한 강한 집착과 동거나 미혼모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은 여전하여, 한국에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붙여주었다. 국내 입양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내놓은 2007년 ‘해외입양쿼터제’는 오히려 해외에 입양되는 아동들이 양부모 품에 안길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늘리는 또 다른 ‘악행’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동거”나 “미혼모”에 의해 탄생한 아이들, 나아가 한국 가족법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인식론에 기반한 사유와 실천을 촉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