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부산지역 화교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당시 일본인들은 초량에 있던 청국 조계지를 지나(支那)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하여 ‘시나마찌(支那町)’라고 불렀다. 본문에서는 우선 식민지도시 부산지역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화상(華商)을 상징하는 포목점과 음식점, 화공(華工), 화농(華農)의 순으로 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 시기의 상황을 소개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노동력 부족에 따라 산동성 출신 다수의 화공이 부산에 진출하여 조선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산동계가 주류를 구성하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화교사회는 북한지역이나 인천 서울 등지에서 꾸준히 팽창한 것과는 달리 부산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1930년대부터는 민족주의의 대두와 정치적 압박이 강화되면서 다른 지역처럼 숫자가 급감했는데, 특히 만보산사건과 중일전쟁은 부산화교가 대량 본국으로 귀국하던 시기였다. 나중에는 소수의 화교만이 초량동과 중앙동 지역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사회를 유지하며 해방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