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州李氏는 고려 귀족사회의 최고의 門閥이자 대표적인 왕실 외척으로서 권력의 최정상에 있었다. 때문에 그동안 인주이씨에 대해서는 주로 중앙의 권력으로서만 파악하여 왔다. 하지만 인주이씨는 중앙의 귀족일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사회와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세력이었던 만큼 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의 귀족의 대부분은 신라말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대두한 豪族에서 기원하는 세력으로서, 이들은 자신의 族的,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지방사회에 두고 있었다. 고려초 고려정부는 사심관제도를 통하여 호족들이 자신의 출신근거지에 대해 지니고 있던 영향력에 바탕을 둔 간접통치의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사심관제도는 호족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중앙귀족이 된 이후에도 이어지며 고려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고려시대 귀족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귀족인 인주이씨 역시 신라말 인천을 기반으로 성장한 호족출신으로서 중앙으로 진출한 이후에도 자신의 세력기반인 인천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련은 사심관으로서의 역할로 이어졌다.
태조대 사심관이 성립되며 인천지역사회의 중심세력이었던 사심관 인주이씨의 위치는 이후 성종, 현종대를 거치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현종대에 자리잡게 된 고려시대 군현제의 특징은 주속현체제로서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보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屬縣이 훨씬 많은 특이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이는 고려의 군현제가 사심관과 향리 등 지방사회에 기반을 둔 세력에 의한 지방사회의 자율적인 운영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현종대 樹州의 속현이었던 인천지역은 수주의 행정적인 관할하에 있기는 하였으나 실제적인 그 내부의 운영에 있어서는 사심관 인주이씨가 향리와 함께 핵심적인 위치를 담당하였다.
숙종대에 들어서 인천지역은 지방관이 파견되며 고려정부에 의한 직접 지배로의 변화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당시 인천지역이 主縣인 慶源郡으로의 승격한 것은 행정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이기 때문이었으니, 왕실외척이었던 인주이씨의 위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후 고려말까지 계속되는 인천지역의 승격 역시 인주이씨와의 관련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숙종대 이후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사심관 인주이씨의 인천지역의 중심세력으로서의 위상은 계속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사심관 인주이씨는 인천지역사회에서 ‘宗主人民’ ‘甄別流品’ ‘均平賦役’ ‘表正風俗’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첫 번째 역할인 ‘宗主人民’은 인주이씨의 인천지역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보여주며, 두 번째의 역할인 ‘甄別流品’, 즉 流品을 심사하는 것은 인주이씨가 인천지역사회에 대해서 담당했던 사회신분적 역할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 번째의 역할인 ‘均平賦役’, 즉 부역을 균평히 한 것은 인주이씨가 인천지역사회에 대해 담당했던 경제적 역할을 보여주며, 네 번째의 역할인 ‘表正風俗’, 즉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인주이씨가 인천지역사회에 대해 담당했던 향촌사회질서 유지의 역할을 보여준다.
사심관 인주이씨는 인천지역사회의 최고의 망족으로서 인천지역사회와 긴밀한 유대감을 지니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위치를 바탕으로 하여 인천지역사회에서 사회·신분적 역할, 경제적 역할, 향촌사회질서 유지의 역할 등 인천지역사회 운영 전반에 걸친 역할을 담당하였으니 인주이씨는 인천지역사회와 실제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세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