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실명에 의하지 않은 예금계약이 금지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금의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와 명의자가 다른 이른바 실명에 의하지 않은 예금계약을 당연히 유효한 것으로 보았고, 단지 그러한 예금계약의 예금주를 누구로 볼 것인지가 문제로 되었으나 이에 대하여도 당해 예금을 사실상으로 지배하는 출연자를 예금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통설과 판례이었다.
그런데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이후에는 실명에 의한 예금거래가 금융기관의 의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이에 위반하여 실명에 의하지 않은 예금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그 예금계약의 유효성 여부가 먼저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이에 대하여는 긍정설과 부정설로 견해가 갈릴 수 있으나 통설과 판례는 여전히 그 유효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비 실명예금계약의 유효성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와 명의자가 다른 예금계약의 예금주를 누구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는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 전과는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비 실명예금의 예금주를 누구로 볼 것인지는 당해 예금의 지급이나 대출채권과의 상계와 관련한 법률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당해 예금을 대상으로 양도나 담보권의 설정 또는 민사집행이나 체납처분이 있은 경우 예치 금융기관으로서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지, 예금자보호법에 의한 예금보호한도의 적용이나 소득세와 과징금의 원천징수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형사법상의 법률관계는 어떠한지 등의 여러 법률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필요한 전제가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하에서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와 명의자가 다른 예금계약의 예금주를 누구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대법원판례는 두 단계를 거쳐 진화하였다.
제1단계는 원칙적으로 명의자를 예금주로 보아야 하지만 금융기관과의 사이에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를 예금주로 하기로 하는 명시적인 약정 또는 묵시적인 약정이 있으면 그 약정에 따라 예금계약상의 예금주 명의에 불구하고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를 예금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대법원 1996.4.23. 선고한 95다55986 판결).
제1단계의 대법원판례는 비 실명예금계약도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그 예금주를 누구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제1단계의 대법원판례는 금융기관과의 사이에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를 예금주로 하기로 하는 묵시적인 약정이 있는 경우에도 명의자가 아닌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를 예금주로 보아야 한다고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비 실명예금계약을 체결하고서도 그 출연자가 큰 불이익이나 위험부담 없이 여전히 예금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 현실의 금융거래에 있어서 비 실명예금계약이 성행하게 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묵시적인 합의의 그 존부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법률관계를 복잡하게 하고 그에 따라 관련 당사자 사이에 많은 법률적인 분쟁을 초래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제2단계는 금융기관과의 사이에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를 예금주로 하기로 하는 명시적인 약정이 있는 경우만 예금계약상의 예금주 명의에 불구하고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를 예금주로 보아야 하고 그 이외의 경우는 모두 명의자를 예금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1단계에서는 묵시적 합의가 있는 경우에도 출연자 또는 예금계약체결행위자를 예금주로 보고 있음에 대하여 제2단계에서는 명의자를 예금주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대법원 2009.3.19. 선고 2008다45828 전원합의체 판결).
제2단계의 대법원판례는 금융실명법에 의한 금융실명제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한 보다 진일보한 판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제2단계 판례는 첫째로 비실명의 예금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출연자가 입을 수 있는 불이익과 위험부담을 높여 비 실명예금계약을 체결하려는 유혹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비 실명예금의 예금주 판단을 간단?명료하게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를 둘러싼 관련 당사자 사이의 법률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불이익이란 명의자가 예금주로 인정되는 경우 명의자와의 분쟁이 생기면 출연자가 자신의 명의로 실명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예금의 지급을 받을 수 없고 이 과정에서 비 실명예금이라는 것이 노출되어 고율의 소득세를 원천징수 당하는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하고, 위험부담이란 명의자가 자신의 예금임을 주장하면 출연자로서는 그 실질관계에서 자신이 예금주임을 주장?입증하지 않으면 예금 자체를 잃을 수 있고, 명의자가 예금을 인출하여 소비하여 버리고 무자력해지면 그 예금에 해당하는 재산적인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제2단계의 대법원판례에 의하여 비 실명예금계약의 발생소지가 줄어들 수는 있다고 하여도 비 실명예금계약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는 현재의 판례와 비 실명예금주에 대하여 고율의 소득세를 원천징수하는 불이익 이외에 다른 불이익을 가하지 않고 있는 현행 금융실명법에 의하는 한 금융실명제를 금융거래에 확실하게 정착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고, 그에 따라 여러 복잡한 법률관계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으로는 부동산명의신탁약정과 그에 따른 부동산등기를 부동산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에서 무효로 하고 아울러 그 당사자에 대하여 과징금부과와 형사처벌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 실명예금계약을 위한 출연자와 명의자 사이의 예금주명의신탁약정과 이에 기초한 금융기관과 출연자 사이의 비실명예금계약을 무효화하고 아울러 과징금과 형사처벌을 하도록 금융실명법을 개정하는 입법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