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해방 후 김기림의 행적을 포괄적으로 추적하고 그 의의를 검출하고자 한 논고이다. 이를 위해 우선 선행 작업으로 일제강점기 시기 김기림이 보인 행적부터 살펴본 바, 그 중 주목할 만한 사안 중 하나가 김기림의 소위 ‘전체시론’이라는 입론 내용임을 확인하였다. ‘전체시론’이라는 그의 포괄주의적 시론 입론 속에는 당대의 경향문학적 입장, 태도를 구출하려는 그의 생래의 절충주의적 태도가 다분히 깃들어 있는 것으로 살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김기림은 ‘조선문학가동맹’ 측에 발을 디딘다. 1946년 2월 중 개최된 ‘전국 문학자 대회’에서 시분과 대표 보고 발언을 행하였던 것이다. 김기림의 이 발언은 대체로 신중하고 온건한 내용 양상으로 좌우 구별 없는 민족적 통합에의 자세를 시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1947년을 지나 1948년 정부수립기를 맞을 때까지, 혹은 ‘문학가 동맹’ 중심 인사들이 대체로 월북 행을 선택, 남한 쪽의 ‘문맹’ 측 활동이 유명무실해지는 상황을 맞기까지 그는 대체로 공식적 정치 노선 상으로는 ‘중도 통합론자’를 표방하면서도 실천적으로 대개 ‘문맹’ 측에 편승하는 비평적 행보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김기림은 남한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보도연맹’이 조직되는 상황을 맞게 됨에 다시 한 번 그 이데올로기 실천상의 표변을 공식화하는 계기를 맞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현실적, 이데올로기적 강박의 분위기로 인하여 하나의 전향선언문격 글을 공식화하여 발표하고 그의 행방 직후 시기 언설적 실천 양상을 스스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0년 6월, 남북 간에 전쟁이 발생하는 상황을 맞게 되자 그의 상황 판단은 다시 한 번 흔들리고, 결국 인민 정치 보위부 앞에 스스로 몸을 노출하게 됐던 김기림은 이후 체포되어 끌려가는 상황을 맞게 되고, 이로써 그의 생의 마지막 행로는 영원히 실종 상태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민족사적 비극의 또 한 유형을 이루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후 좌고우면한 김기림의 이러한 행적은 기본적으로 김기림이 이데올로기적 인간이 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김기림은 실무적으로 뛰어난 인간이었다고 하겠으며, 그 실례로 그의 마지막 저서이자 문체론 저작인 문장론 신강을 제시할 수 있다. 여기서 김기림은 ‘한글 문체 수립론’을 주장하면서도 어휘 현실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김기림의 성향인 절충주의적, 중도주의적 면모를 재차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