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양채라 함은 대부분 건륭시기의 화려한 양채를 의미한다. 반면 옹정시기 양채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그 존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최근 들어 몇 점씩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 배경에는 분명 옹정시기에도 양채가 제작되었지만, 건륭시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傳世되는 과정 중에 옹정양채가 법랑채 혹은 분채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지금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한 대상에 대한 여러 명칭의 혼재는 이들 작품에 사용된 안료와 제작공정, 외관상 특징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건륭시기 양채에 가려진 옹정양채의 특징을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양채와 자태화법랑의 기준이 모호한 상황에서 실제‘ 양채’라는 명칭이 지니는 含意를 청대의 문헌을 통해 추적해 보고 오늘날 우리는 그 대상을 어떻게 규정해야 옳은지 규명하고자 했다. 조판처와 어요창간의 인력 및 기술교류가 이루어진 만큼 법랑채-양채-분채는 외관상에 드러나는 차이점 보다는 제작지에 따른 명칭의 분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건륭제가 양채를 진흥, 발전시키는데 주력하였고, 청궁 내에서의 위상 역시 높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옹정시기의 양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아울러 기존에 자태화법랑과 분채로 분류되었던 옹정시기 자기들 중에서 양채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먼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洋’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것은 ‘서양의 개념을 충실히 모방하고 응용’했다는 당시 인식의 결과에 따른 것으로, 서양의 화법랑 기술을 빌려 ‘이전엔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중국 자기’를 만들고자 했던 자태화법랑과는 그 성격이 달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