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 후기 불교조각이 갖고 있는 독창적 요소를 圖像, 造形性, 流派의 본격적 성립이라는 세 측면에서 해석한 글이다. 첫 번째 도상의 측면에서는 전체 불교권에서 유일한 제화갈라보살-석가불-미륵보살로 구성된 ‘一佛二菩薩形’의 三世佛 도상의 창안에서 찾아보았다. 두 번째 조형성 측면에서는, 불전 내 의식의 빈번한 설행으로 촉발된 불전 내부의 불단, 대좌, 바닥 등의 평면상, 입면상 변화로 인해 궁극적으로 불상 조형이 변화한 것에서 찾아보았는데, 이 과정에서 조각가들의 독창적 면모가 잘 드러나 있었다. 세 번째는 유파의 탄생에 관련된 독창적 면모이다.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찰을 재건하기 위하여 수많은 불상을 조성하고 천여 명의 조각승들이 활동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승관계에 기반을 둔 유파가 출현하였으며, 각 유파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면모를 찾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사찰의 나한전에는 십육나한상과 함께 삼세불상이 주존으로 봉안되어 있다. 삼세불은 중앙의 佛形의 석가상을 중심으로 하고,좌우의 미래불인 미륵, 과거불인 제화갈라가 모두 菩薩形으로 봉안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왜냐하면, 조선과 같이 십육나한상(혹은 십팔나한상)이 조성되었던 중국에서는 십육나한과 삼세불이 결합된 사례가 하나도 없으며, 십육나한과 결합하지 않은 독립적인 삼세불상도 모두 佛形의 삼세불만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의 授記三世 중에서 석가와 미륵 사이에 無佛時代를 수호하는 십육나한이 들어감으로써 과거-현재-미래가 보다 완전하게이어져 있게 된 것이다. 즉, 삼세불과 십육나한은 시간과 수기를 매개로 완벽하게 결합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조선에서처럼 한 공간 안에 봉안되었을 때보다 완벽한 결합이 될 수 있다. 즉, 도상의 측면에서 나한전의 一佛二菩薩形의 삼세불은 조선 후기에 새로 창안된 도상이며, 조선 후기 불상의 독창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불상의 조형적 특징이라고 알려진 ‘목을 숙이고 자세를 웅크린’ 모습은 불전 내 의식의 성행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건축 구조 상의 변화에 대하여, 조각가들이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처하여 만들어 낸 조형이라고 추정되었다. 불전 안에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던 조선 후기 사찰에서는 예배상의 존엄성을 갖추기 위하여 불단과 함께 높은 대좌가 별도로 더 설치되었는데, 조선 전기 이전의 불상보다 두 배 가량 높은 위치에 불상이 봉안되기에 이르렀다. 봉안 위치의 변화 속에서 조각가들은 예배자와 예배상의 영적교류를 이루기 위한 불상의 圓滿相을 표현하기 위하여 목을 숙이고 웅크린 자세를 취한 불상을 창안하게 된 것이었다고 판단되었다.
조선 후기 조각이 가진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조각승 유파가 본격적으로 성립한 일이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인 재건 불사에 따라 급격히 늘어난 불상 조각의 수요에 따라 수많은 조각승들이 활동하게 되었고, 사승관계에 따른 자연스런 집단이 형성되었다. 집단 내 조각승들은 많은 불사를 함께 행하면서 점차 사승관계에 따른 교육-학습 관계가 보다 중요하게 이루어졌으며, 首長의 조각 방식과 樣式을 공유하는 유파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파의 본격적인 성립은 개인 조각가의 독창성을 바탕으로 한 작가 의식에서 시작하였다고 판단된다.
조선 후기의 불교 조각은 종교미술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圖像, 樣式, 流派 면에서 조선 후기만의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면모를 갖고 발전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불교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밑바탕은 낮은 곳에서 좀 더 폭넓게 자리를 잡으며 능동적으로 변화하였던 결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