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에 오면 세시와 풍속 관련 저작이 집중적이면서 대량으로 출현하는데, 『京都雜志』·『洌陽歲時記』·『東國歲時記』와 같은 산문 세시기와 연작형 기속시들이 있다. 본고는 18·19세기 집중 저작되는 세시풍속 관련 기록을 대상으로, 조선의 자기 표상화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였고 세 가지 지점에서 조선의 자기 표상화 과정을 지적하였다.
이 시기 작가들은 풍토의 다름을 인정하고 중국 세시기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세시기를 쓰겠다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당대를 소중화의 시대로 평하고 중국 문헌에서 근거를 찾아 우리 문화를 중화로 수식하려 하였는데, 이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하·은·주를 계승한 기자 문화를 간직한 우수한 문화가 현존하는 나라 조선이, 이 시기 세시풍속 관련 저작의 작가들이 세시풍속서에서 표상하고자 했던 “조선”이다.
또 이 시기 세시풍속 관련 저작의 작가들은 당시를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로 이미지 짓고, 그 근거를 세시를 맞아 풍요롭게 세시풍속을 거행하는 백성들의 모습에서 찾았다. 세시풍속 관련 저작의 작가들은 중화의 계승자임을 자부함으로써 문화적 우수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찾고자 했고, 다른 나라와 다른 조선의 고유성으로 성군이 성덕으로 다스리는 태평성대를 부각시켰다. 고대 중화의 유풍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성군이 성덕으로 다스리는 태평성대한 나라 조선이, 또한 이 시기 지식인들이 세시풍속서를 통해 표방하고자 했던 “조선”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 세시풍속 관련 기록에는 풍속의 유래와 출처, 풍속의 소개, 그날의 풍속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과 더불어 풍속이라 묶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일상들이 포착되고 재현되어 있다. 이렇게 소박하게 재현된 일상은 세시풍속 관련 저작이 가지고 있는 태평성대와 중화라는 표상에서 중화를 탈각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일상의 재현은 이 시기 세시풍속 관련 저작이 가장 정직하고 직접적으로 조선의 표상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