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의 완성 과정에서 중소분쟁이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북한과 중국,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안보-자율성 교환이라는 비대칭동맹의 딜레마로는 설명될 수 없는 특수한 사례로 전환되었음을 증명하려 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중소분쟁은 1962년에 접어들면서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그동안 대외안보를 중국과 소련에 의지하여 왔던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이 약소국에 대한 안전보장의 약화로 이어지자, 자체적인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특히 1962년 말 소련의 군사적 지원 중단으로 북한은 중국에 편승하기로 결정하고 국방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 같은 결정은 1962년 12월 1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국방에서의 자위와 병진노선 채택으로 나타났으며, 4대 군사노선 중 전군의 현대화를 제외한 일부 군사노선이 우선적으로 제시되었다. 북한은 중국에 편승하여 경제·군사적 실리를 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 북한의 안보위협은 더욱 고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진영 내에서도 외교적 고립 위기에 처하였다. 결국 북한은 흐루시초프의 실각을 계기로 대소접근을 시도하고 소련과 해빙기를 맞이했다. 소련과의 관계 회복으로 북한은 비로소 소련으로부터 현대적 장비를 수입하고 조선인민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국제관계에서 편승의 대가를 깨달은 김일성은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소분쟁에서 중국과 소련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자주노선을 공식 외교노선으로 선언하였다. 이와 함께 전군 현대화를 추가한 4대 군사노선을 완성하고 국방과 경제의 병진노선을 재확인하였다. 결국 중소분쟁이라는 비대칭 동맹의 관계 이완은 북한의 자율성 상승을 야기하였지만 강대국이 제공하는 안전보장의 약화와 함께 ‘낮은 수준의 안보-자율성 교환’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군의 현대화와 병진노선의 적용은 북한의 경제·군사 부문에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것을 요구함으로써 북한의 경제에 먹구름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