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적 세계는 무한하고, 복잡하며, 심지어 매우 이상하기도 하다. 지속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의미를 파악하기보다 점점 더 의미의 미로에 빠져드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학적 지침들 중 가장 난해한 것은 아마 해석자는 “텍스트를 우선 그것의 저자와 동등하게 그리고 심지어 훨씬 더 잘 이해”해야만 한다는 슐라이어마허의 지적을 들 수 있겠다. 여기서 그는 저자와 “동등한 이해”와 “보다 나은 이해”를 구분한다. “동등한 이해”를 통해서 그는 그의 해석학의 특징인 “이해”란 저자의 의미를 해석자가 재발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동등한 이해”에 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나은 이해”란 개념은 적어도 너무나 무리한 요구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단지 슐라이어마허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인들인 칸트, 피히테, 쉘링, 슐레겔 형제들과 노발리스 등과 같은 지성인들이 모두 “보다 나은 이해”를 주장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보다 나은 이해”가 그 시대의 역사적인 요청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저자가 때로 자신의 내적인 확신과는 달리 말하거나 심지어 생각한다는 점에서 “보다 나은 이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칸트보다 더욱 더 구체적으로 슐라이어마허는 저자의 외적인 관계가 저자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보다 나은 이해”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금지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언론 출판 검열이다.
“보다 나은 이해”가 검열과 관계가 있는지는 슐라이어마허의 삶을 통해서 검증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생 시절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여 모라비안교로부터 파문까지 당했었으며, 신학보다 철학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고, 철학자 중 가장 비판받는 스피노자를 존중했으며, 비윤리적이라고 비판받던 낭만주의자들과 교제하였다. 특히 그의 최초의 저서인 『종교론』을 집필하면서 수사학적 작문을 통해 외적으로 국가종교를 수용하면서도 내적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종교관을 표현하여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칸트나 슐라이어마허의 “보다 나은 이해”와 프로이센 국가종교의 검열제도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 집필 과정의 재구성을 통해 드러난 수사학적 작문을 종합하여 볼 때 “보다 나은 이해”란 저자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외적으로 검열관의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내면적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사상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글에서 저자의 진정한 사상을 발견하고 그것과 “같은 이해”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다 나은 이해”에서 저자와 “같은 이해”는 “다른 이해”가 아니라 “나은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