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정신적 변증법’이라는 거대 이야기를 추구한 헤겔의 사상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주체의 해방’이라는 거대 이야기를 추구하는 마르크스의 사상 역시 더 이상 보편적 규범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거대 이야기의 파산은 진실한 것과 올바른 것의 명백한 정당화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정당성을 근거 지워 주었던 하나의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이성은 다수의 특수한 이성으로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특수 이성들은 공약 불가능한 이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적 시대에 윤리적 정당성은 상호간의 합의나 일치의 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와 공약불가능성의 원리에 놓여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갈등이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그 갈등을 중재할 법정이나 보편적 규범이 부재한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분쟁을 선택하는 길 뿐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각 문화는 이질적이고 공약 불가능함으로 이행이나 환원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조정하고 중재하고자 한다면 폭력과 손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당성의 근거는 도덕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분쟁의 실행에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