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 외국인들의 눈에 한국의 대표 이미지로 보였던 숭례문, 경회루, 황궁우는 조선시대에서 대한제국기에 이르기까지 도성 문, 궁궐의 누각, 원구단의 주요 건물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개항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대표적인 문으로, 외국인들에게 한양의 표상에서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혔으며, 수많은 기행문에 기록되거나 사진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통감부 시기인 1907년에 양쪽 성벽이 헐리고 1937년에는 통행이 완전히 금지되어 문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이후 숭례문은 관광의 대상으로 전락했으며 이러한 시선은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다. 이제는 다만 ‘국보 1호’인 문화재로 인식될 뿐이다.
황궁우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원구단의 주요 건물이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원구단 자리에 철도호텔이 세워지면서 홀로 남겨졌다. 이후 호텔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이국적인 정취를 안겨주는 정원의 건물처럼 인식되었다. 현재에도 황궁우는 본래의 맥락을 잃어버린 채 조선호텔의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경회루는 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의 주요 전각으로, 국왕이 연회를 베풀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비운 이후 일본인 관료들의 연회장이 되었으며 이러한 관습은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역사적인 연원을 간직한 이러한 건물들이 현재는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지만, 여전히 눈요기거리인 관광의 시선에 머물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건물들이 외국인들의 눈에 한국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인식된 것은 근대기에 형성된 이국취미의 시선에 의한 것이었으며, 본래의 역사문화적인 맥락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국보, 사적 등으로 지정된 오늘날에도 과연 그 가치가 제대로 복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반성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