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심판(審判)」(1947)은 일본의 전범재판이 진행중이던 시기에 집필되었다. 이 소설은 ‘지로(二郎)’라는 일본병사가 중국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와 그에 따른 죄의 자각,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일본문단에서는 가해자 일본군의 자화상과 전쟁책임의 문제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착실하게 추구한 작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본 논문은 「심판」이 그 시기 보기 드물 정도의 깊은 성찰을 보인 작품이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현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지로’의 치열한 내적 탐구의 계기와, 죄책의 자각이라는 주제의식에 이르는 과정에, 실은 매우 핵심적인 사항들이 결락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사법적 차원만이 아니라 도덕적 차원의 전쟁책임 논의에 비추어, 작품의 공백과 ‘지로’의 한계라는 관점에서 재독하였다. 소설 속에서도 ‘지로’의 심판은 사법적인 제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차원의 자기처벌을 수용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로’가 저지른 두 번의 민간인 사살은 단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국적의 차이가 총격의 유일한 동기라고 할 만큼 무의미한 살인이었다. 특히 첫 번째 사살은 국가의 명령계통에 따라 행해진 것이었기에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과 전쟁범죄에 대해 ‘비(非)일본인’이 추궁해야 할 전쟁책임의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국민으로서 성실하게 징병의 의무에 응한 ‘지로’가 그 성실의 결과 양민 살상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 소설은, ‘지로’의 배후에 놓인 국가적 책임의 계통구조를 상기시키고, 동시에 엄연히 그 구조의 일부로 작용하는 말단병사의 정치적․도덕적 책임의 엄중함도 함께 일깨울 수 있는 플롯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심판」은 명령계통을 거슬러 올라가 책임의 근원지를 드러내거나 암시하지 않았고, 지로 자신의 가해의식도 별반 드러내지 않았다. ‘지로’의 희박한 가해자의식은 ‘전시하’라는 예외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배후에 놓인 국가의 명령계통에 책임의 상당 부분을 전가하고 있기 때문일 텐데, 현실의 도쿄재판에서 ‘천황’이 빠졌듯이, 소설 속에서도 최고책임자와 말단의 연결고리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또한 「심판」은 전쟁책임을 다루면서도 고통에 찬 ‘타자’의 호소와 항의의 목소리를 결락하고 있다. 지로는 자신의 전쟁범죄와 그 범죄를 약혼녀에게 고백한 행동까지도 본인의 의지와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고 얘기함으로써 스스로를 ‘책임질 주체’, ‘사죄할 주체’로서 정립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강조하듯 ‘책임(Responsibility)’을 ‘타자에 대한 응답(Response) 가능성’이라고 보거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처럼 ‘주체’를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개념으로 본다면, 지로가 전쟁책임을 받아들이는 경로에는 ‘타자(=피해 당사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으로서 존재하는 ‘주체’의 모습은 희박하다. 전쟁의 최고책임자, ‘타자’, 가해의식 등 「심판」이 말하지 않은 것들은 패전 이후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전개되어 온 일본의 전쟁책임 논의에서도 거의 침묵으로 일관되거나 가려진 부분과 겹치는데, 그런 점에서 「심판」은 오히려 말하지 않은 ‘공백’들을 통해서, 패전 70주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책임 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