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동서고금 어느 사회에서나 확인되지만 특히 우리 민족은 정결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간직하려는 노력이 강했다. 化粧에 대한 관심이 높아 삼국시대부터 좋은 질의 화장품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얼굴을 곱게 꾸미는 행위인 化粧은 아름답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목적도 있다. 따라서 화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각 시대의 사회상과 미의식을 반영하는 문화의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최근 조선후기 王室墓들이 발굴되면서 왕실 사람들이 썼던 陶瓷와 玉 그리고 銀으로 제작된 化粧容器들이 알려졌다. 이들 화장용기들은 여성묘 뿐 아니라 남성묘에서도 발견되어 조선시대 化粧文化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은 고려 말에 유입된 性理學을 반으로 儒敎가 국가의 근간이 되었던 사회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원리에 따라 墓葬이 정해졌다. 즉 신분에 따라 분묘의 위치, 구역, 규모, 부장품에도 제한이 있었다. 조선 초 『世宗實錄』 「五禮儀」가 편찬되면서 왕실과 大夫士庶人에 따른 喪葬節次가 정비되면서 부장품의 종류와 재질이 정해졌다. 후기에서는 조선 후기인 영조 20년(1744)에는 「五禮儀」의 속편인 『續五禮儀』가 정비되고 『喪禮備要』를 보강한 『四禮便覽』의 재정비되면서 상장의례는 더욱 간소화되었다.
화장용기가 발굴된 왕실묘는 淑愼公主(1635-1637), 懿昭世孫(1750~1752),和柔翁主 (1740-1777), 元嬪洪氏(1766-1779), 文孝世子(1782-1786), 淸衍公主(1754-1821)의 묘들이 있다. 특히 이 글에서 주목하는 은제용기는 숙신공주와 원빈홍씨의 묘에서 확인이 되었다. 기록상에는 조선 왕실에서는 은으로 식기, 제기 등제작하여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는 작품은 이 글에서 살펴본 화장그릇보다 연대가 뒤인 19세기 이후의 작품들이 몇 점 전할 뿐이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 살펴본 숙신공주와 원빈홍씨의 은제화장기들은 조선시대 은기의 기준 작으로 매우 중요하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금은기에 대한 규제를 강하게 시행하였다. 화장기는 은으로 사용될 수 없는 기물이었다. 또한 조선 초 『世宗實錄』 「五禮儀」가 편찬되면서 왕실과 大夫士庶人에 따른 喪葬節次가 정비되면서 부장품의 종류와 재질이 정해졌고, 금은기는 부장품으로 절대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숙신공주와 원빈홍씨의 은제화장기가 부장품으로 사용된 것을 볼 때 규제는 잘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문효세자와 의소세손의 경우 원빈홍씨의 은제수적과 같은 기형의 화장기가 청동으 제작된 것을 볼 때, 왕실에서는 될 수 있으면 규범을 따르려고 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16세기 이후 부장품으로 실제 사용되던 기물을 축소한 명기가 부장되는데 대부분 순백의 재질이다. 실제 화장품이 담긴 도자 화장용기가 당시 일본이나 중국에서 수입한 다채자기인 점은 조선사회가 장식적이고 화려한 미감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을 나타낸다. 은제의 화장기들이이들 명기와 함께 부장된 것은 그만큼 조선사회에서 화장이 긴요했던 것임을 반영한다. 특히 남성의 묘인 의소세손과 문효세자의 묘에서도 화장품이 담긴 화장기가 출토된 것은 조선시대 왕실의 조선시대 왕족 남성들이 분화장을 비롯한 화장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교적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사회에서 남성의 희고 윤택한 피부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고귀한 신분임을 나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원빈 홍씨의 모두 11점에 달하는 화장용기는 조선시대 여성의 화장이 현대와 같이 기초화장 및 색조 화장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조선시대 여성은 혈색이 좋은 여성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귀한 복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윤택한 피부와 더불어 연지를 통해 건강미를 표현하려고 했다. 원빈 홍씨의 경우 실제 연지가 담긴 합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숙신공주와 원빈 홍씨의 은제화장기에는 다양한 문양과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숙신공주의 銀製 鉛入絲 仙境文 化粧壺는 당시 궁전화사의 작품을 연상케 할 만큼 포치나 구도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궁정화사의 도안을 받아 조각장이 이를 시문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은장들이 작업해야할 물건들은 다양하였다. 기본적으로 왕, 왕비, 세자 등의 왕실 식기 이외에도 빈전의 제기가 있다. 또한 공헌이 있는 자에게 포상으로 주는 은기와 사신접대용 은기가 있다. 이들 그릇들은 격식에 따른 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화장기들은 왕실의 식기와 제기와는 달리 형식에 억매이지 않은 기형과 문양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사용자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제작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