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 사회는 ‘대학 구조 개혁’과 관련하여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 변화에의 요구는 일차적으로는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과연 우리가 미술대학에서 어떤 교육 목표를 갖고 어떻게, 무엇을 교육하고 있는지에 대해 점검해볼 시기가 되었다.
필자는 우선 미술대학의 교육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던 티에리 드 뒤브가 진단한 미술교육의 세가지 모델, 즉 아카데미 모델, 바우하우스 모델, 해체주의 모델에 대해 소개하고, 그가 현재의 교육 모델이라고 예시한 해체주의 모델을 어떤 입장에서 비판했는지 살펴보았다. 그가 말하는 해체주의 교육 모델은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 모델에서 중시했던 장인적 훈련이나 바우하우스 모델이 중시했던 창의성 훈련의 자리를 각종 이론과 담론을 앞세운 정치적 “태도”가 차지한 상황을 말한다. 그가 이 “태도”의 모델을 문제삼은 것은 그가 반드시 예술의 정치적 입장 표명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매체나 마티에가 사라지고 오직 태도만이 남았을 때, 미술의 전통과 관습이 과연 무엇을 통해 유지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염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드 뒤브의 입장을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 개념,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람자”의 개념을 통해 점검해보았다. 그리고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시각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감각의 확장과 나눔이 미술현장에서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태도’는 어떻게 가르쳐질 수 있을까? ‘태도’가 기존의 감성의 분할을 넘어서고 새로운 감성을 나누는 일이라면, 즉 열정이라면, 이것은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론과 미술사, 각종 ‘테크닉(technique)’과 ‘기법(skill)’을 가르칠 수 있어도, 예술 그 자체는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이 제도기관의 교육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이 모순의 자리에서 고민하는 스승은 제자를 해방함으로써, 즉 제자가 내가 모르는 것을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자임을 믿고, 그의 능력을 현실화하도록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의식의 좀 더 깊은 곳에서 삶에 대한 자신의 감성적 ‘태도’를 발견하게 하는 일, 그 ‘태도’가 우리를 살고 싶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미술교육의 숨겨진 내용이자 교육적 역량의 원천임을 조심스럽게 전망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