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머리말은 번역의 의의와 시대적 가치뿐 아니라 번역 주체의 고유한 목소리를 함께 담고 있다. 식민지 시기의 번역가는 머리말을 통해 번역 동기와 경위를 드러내고 동시대의 문예사조를 소개하거나 새로운 용어와 개념을 도입했다. 또한 번역가가 개성적인 번역론을 펼치고 독자와 대화를 시도하는 장으로 머리말이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의 번역시 앤솔러지는 여타 장르에 비해 번역가가 제한적이며 단행본 출판의 성과도 가장 취약하다. 그중에서 김억과 임학수의 번역시집은 뚜렷한 번역 의식과 일관성을 드러냈다. 초창기의 서양시 번역을 선도한 김억은 식민지 시기 최대 규모의 시 번역가다. 동시대의 영시를 번역한 식민지 시기의 마지막 앤솔러지 편집자 임학수는 영문학 정전의 번역을 통해 전문성을 획득했다. 근대 번역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김억과 임학수를 통해 번역가의 목소리를 역사적으로 조명할 수 있으며, 식민지 시기에 한시 및 영문학 번역의 계보가 성립된 배경과 성격을 재평가할 수 있다.
김억은 시집의 머리말을 통해 구체적인 번역 방법론을 개진하면서 번역 실천을 수행했다. 번역시의 독자적인 가치를 중시한 김억은 시종일관 시 번역의 창조성과 개성적인 의역을 강조했으며 독자의 취향과 감식안에 중점을 두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여성 한시 번역에 몰두한 김억은 서양시 번역에서 내세운 원칙을 일관성 있게 지켰다. 김억의 번역론은 한시와 한문학의 유산을 타자화함으로써 외국문학으로 포착해 내고 정전의 재평가와 새로운 시형을 실험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식민지 시기의 마지막 영시 앤솔러지를 펴낸 임학수는 19세기 영문학에 주력하면서 전문 번역가로 성장한 희귀한 사례다. 해방 전후의 1940년대를 관통한 임학수는 영문학의 정전과 동시대의 영미문학을 통해 번역의 역사성을 획득했으며 해외문학파와 구별되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일관성과 집중력을 발휘한 임학수의 번역 실천은 분단 이후 북한의 영문학 연구와 번역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