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개신교 선교는 사진 기술의 보급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사진기를 사용한 중요한 서양인 집단이었다. 본 논문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19세기말에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찍은 사진 중에서 한국 종교에 관련된 것들을 분석하는 작업이다. 선교사들이 찍은 한국 종교 사진은 그들이 한국에서 경험한 바를 대상화시켜 ‘종교’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비교와 일반화의 과정, 즉 종교 개념화 과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말부터 개신교 선교 현장에서 사진은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진은 본국의 교인들에게 선교지의 성과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선교 지원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통로였다. 한국에서도 선교사들은 사진을 통해 서양의 독자들에게 한국의 모습을 전달하였고, 그 중에는 한국 종교를 찍은 것도 포함되었다. 이 사진은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본 바를 ‘종교’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사진은 종교의 인식 과정에 대해 기존의 문헌 자료들이 보여주지 못한 측면을 밝혀주는 자료로서의 가능성을 갖는다.
첫째, 선교사들이 사용한 종교 사진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대상을 통해서 한국 종교에 대한 인식을 전개하였는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주로 서울 지역에서 활동한 이들이 비교적 용이하게 접근 가능했던 대상들이었다. 서울 경내의 원각사지, 서울 인근의 보도각 백불과 여러 사찰들, 그리고 장승과 무녀가 그들이 한국 종교를 개념화하는 데 바탕이 된 자료들이었다.
둘째, 사진이 사용된 방식을 통해 우리는 사진이라는 자료의 특수성을 볼 수 있다.
사진은 시각적 경험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자료가 아니다. 사진이 촬영된 맥락과 촬영자의 의도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진과 함께 제공되는 표제어와 본문 내용에 의해, 사진은 다양한 의미를 전달한다. 무녀와 장승의 사진이 전혀 다른 본문에서 다른 내용을 전달하는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사진과 함께 그것을 사용하는 저자와 편집자의 의도를 고려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만남의 정황에서 출현하는 개념이다. 만남의 초기에 서양인들은 한국에 종교 개념을 적용할 수 없었고, 그 인식론적 실패가 ‘볼 수 없다’는 언어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 개념에 대한 성찰을 거쳐 종교에 해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사진은 종교에 대한 시각적 추구의 결과물로서 생성되었다. 여러 주체들의 의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사진은 독자에게 진실성의 부여라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면서 한국 종교의 존재를 증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