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의 특수성이 신화적 종교적 주제들과 결합되었을 때 기존의 종교적 틀, 혹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신화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영화는 종교적 시공간을 이 순간에 불러오고, 비가시적 종교적 상상력을 눈 앞에 재현하며, 따로 떨어진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기에, 영화가 출현한 이후 종교와 관련된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져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종교적 신화적 요소들이 활용될 때 이는 단순히 기존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종교와 신화에 대한 작가만의 고유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어 왔다. 이 글에서 살펴 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태국의 불교적, 신화적 주제들을 빈번히 사용하지만, 이를 통해 종교와 신화의 원형적인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국의 현대사 속 기억과 망각,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아피찻퐁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피찻퐁의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종교적 신화적 주제인 변신, 환생, 유령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징으로 대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피찻퐁은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영화(라는 현대의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가 혹은 영화라는 신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억압되고 잊혀진 기억 속에서 불현듯 출몰하는 유령이며, 역사 속에서 온전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잊혀져 간 존재들의 잔존하는 이미지다. 아피찻퐁의 영화는 영화가 변신으로, 환생으로, 유령으로 기능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며, 그 속에서 잊혀졌지만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닌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아비 바르부르크가 미술사 연구에서 그리고 디디-위베르만이 이미지에 대한 연구에서 강조하는 ‘잔존’ 개념과 맞닿아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아피찻퐁의 영화 속 신화적 종교적 세계가 ‘잔존’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아피찻퐁의 영화는 ‘잔존’을 중심으로 신화의 개념을 다시 고찰해 볼 수 있는 지평을 열어준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