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쾨르에 따르면, 이야기는 파편적 시간 경험들과 복수적 사건들을 하나의 줄거리 안에 배열하고 구성하여 종합한다.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나 공동체적 역사의 차원에서나 이야기는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의 의미를 드러내주며, 정체성을 구성하고 보존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고, 죽음을 넘어 자기 삶의 의미를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서사 정체성이 아무런 위험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모든 경험을 하나의 줄거리로 엮어 하나의 단위로 묶을 때, 거기에서 ‘동일성의 전체화’라는 폭력적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이와 같은 위험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글은 서사 정체성은 일정한 구성적 타자성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분석한다. 정체성 구성을 위한 이야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언어체계와 규범에 의존해야 한다. 또한 모든 이야기는 듣는 타인을 향해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관계적이다. 서사 정체성은 매끈하고 투명하게 완결되지 않는다. 몸을 지닌 존재이자 구체적이고 독특한 단독자로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한다. 서사 정체성은 자기에 대한 불투명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서사 정체성의 구성적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 서사 정체성의 포기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구성적 타자성을 인정함으로써 서사 정체성이 빠질 수 있는 동일화와 전체화의 폐쇄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아가 타인의 독특성과 연약성에 대한 민감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윤리적 에토스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