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港이 권역내의 어업, 운송 등 대내 기능을 맡고 있었다면, 外港은 외교교섭이나 대외교역과 같은 대외적 기능을 수행했다. 외항은 국가가 어떤 항구를 대외용으로 특정한 것으로서 국가제도에 의해 설치ㆍ운영되었다.
사로국 시기부터 이용된 阿珍浦는 漁港이 주 기능이어서 외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3세기 후반 무렵 신라는 于尸山國을 복속하고 栗浦라는 외항을 확보했다. 율포 인근에는 굴헐역이 설치되어 국가의 행정적 통제가 이뤄졌다. 중앙의 권력이 외항에 직접 개입하여 통제하는 방식은 구야국 및 전기가야연맹이 취한 交易場의 中立化 정책과 대비된다.
6세기 초까지 신라가 중국 왕조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가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532년에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김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신라는 梁, 陳과 교류하는 데 새로운 외항 혹은 중간 기착지로서 활용할 수 있었다.
신라 사절은 羅濟同盟 관계를 이용하여 6세기 전반까지는 백제 사절을 따라 서해 중부 횡단항로에 편승할 수 있었다. 553년에 신라가 黨項城을 장악함으로써 6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비로소 왜, 백제, 그리고 중국 측 국가와 海路를 이용하여 교통할 수 있는 국가적 外港體系를 갖추게 된다.
신라는 4세기 이전부터 고구려와 교류하였으며 육로와 더불어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연안항로가 늦어도 5세기 초에는 개설되어 있었다. 대고구려 교통로는 여러 갈래로 열려 있었으나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악화될 때는 신라의 對北朝 교섭이 어려워졌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나당동맹에 의해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극복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