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후 꾸준한 지표조사를 실시해 온 결과, 전북 서해지역에는 20개소의 봉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봉수들이 그동안 조선시대 5봉수로의 제5거 루트에 해당되거나, 조선 후기의 권설봉수로 이해하여 그 조성 및 운영시기를 단순히 조선시대로 단정지어 왔다.
그러나 봉수들의 분포권이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사용되었던 서해 연안항로와 일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는 봉수도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봉수가 축조되어 신호전달기능 뿐만 아니라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돕는 등대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방문한 후, 기록한 『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흑산도에서 개경까지 봉화를 올려 뱃길을 안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선박의 항해에 있어 봉수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일찍부터 해상을 통해 국제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특히 서해안과 남해안은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고,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여 선박이 항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돕는 시설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역할을 봉수가 대신했던 것이다. 실제로 서해안과 남해안에 분포되어 있는 봉수 대부분은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으며, 중요 도서지역에도 많은 수의 봉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전북 서해지역은 삼국시대 때 백제의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해로의 중심지였으며, 백제와 신라, 당, 왜 등이 참여하여 대규모의 해상전을 벌인 역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중국의 남송에서 수도인 개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각 지방에 설치된 13조창에서 물자를 운반하는 조운선의 항해가 빈번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전북 서해지역 봉수들의 기능은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봉수의 위치와 현황을 고려해 볼 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선박의 순조로운 항해를 돕는 기능이 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육로개척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연안 봉수들은 5봉수로의 제5거 루트로 편재되어 지방의 급보를 중앙에 전달하는 기능을 담당했지만 항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도서지역 봉수의 경우에는 그 중요성이 점차 퇴색하였다. 다만 16세기 이후 왜구와 해적들의 노략질 심해지자 서해상의 중요 도서지역에 다수의 수군진이 설치되는데, 이때 도서지역의 일부 봉수들은 권설봉수로 다시금 재편되어 서해 방어의 핵심기능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