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은 누구에게 계승되었을까? 고종은 그의 통치기간 내내 일본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음에도, 일본과 타협하지 않고 침략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하고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나선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 이 의문들은 본 논문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고종황제와 김규식이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고종과 김규식의 부친인 김용원(金鏞元)과의 특이한 인연과 관련이 깊다. 이는 1885년 초 김용원이 고종의 지시에 따라 연해주에 파견되어 러시아임무를 수행하다가 청국의 반발로 유배의 고초를 겪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규식의 미국유학은 고종황제의 배려의 산물이었으며, 그가 수학했던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서 의친왕 이강(李堈), 이범진의 장남 이기종(李璣鍾) 등과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향후 국제무대에서 고종의 항일독립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김규식이 발탁된 것도 이같은 정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종황제가 일본의 침략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강력하게 저항한 사상적 논거는 “對日歷史文化優越論”과 일본의 침략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 국제조약을 위반했다는 “不法論”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전자는 한일 양국민족이 함께 병합될 수 없는 논거가 되었고 후자는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가 되었던 바, 양대 논리는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열강에 설득할 핵심논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고종황제가 러일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개최된 포츠머스강화회의 기간에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II(НиколайII)세에게 보낸 친서(1905.8.22)와 김규식이 제1차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1919.4)에는 위의 두 가지 핵심논리가 공유되고 있다. 또한 상해 臨政에서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해 편찬한『韓日關係史料集』(1919.9)에도 이 논리들은 체재와 내용이 보완되어 계승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