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이후 한국사회의 대중들은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핵발전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원자력 낙관주의’라 규정하고, 이를 물신주의적 믿음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제2절에서는 원자력 낙관주의의 범례로서 나가이 다카시(永井隆)의 생애와 사상을 예비적으로 검토했다. 특히 원자력에 대한 그의 낙관적 믿음을 만들어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하여 의사 외에 그가 지녔던 원자물리학자, 가톨릭신자, 황국신민의 정체성을 주목해서 살펴보았다. 나가이 다카시의 경우는 원자력 낙관주의 분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이론적 실마리를 제공했다. 첫째, 원자력에 대한 나가이의 낙관적인 ‘믿음의 원인’이 그 ‘믿음의 대상’인 원자력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욕망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둘째, ‘원자력’이란 대상이 그에게는 피폭 체험 이전부터 갖고 있었고, 피폭을 계기로 더욱 극대화된 어떤 욕망과 환상이 빚어낸 ‘물신(物神)’임을 보여주었다.
제3절에서는 ‘후쿠시마’ 이후 한국사회의 ‘핵에 관한 대중적 수용성’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후쿠시마’ 이후 수행된 다양한 조사들과 연구들은 한국의 대중들은 ‘후쿠시마’의 재앙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의 사회적 필요성 및 경제적 효용성에 근거하여 핵발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후쿠시마’ 이후 한국사회의 원자력 낙관주의는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 핵의 경제성에 대한 물신주의적 믿음을 만들어내면서, 결국 핵에너지의 위험성과 핵발전과 연관된 다양한 사회적 고통들을 은폐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제4절에서는 ‘원자력 낙관주의’를 종교적 믿음에 비견되는 ‘물신주의적 믿음’으로 구체화하여, 그러한 물신주의적 믿음이 어떤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단지 경제적 효율성이 가장 높다는 이유로 핵발전의 필요성을 “그냥 그대로 믿어 버리는 차원”으로 만들어버린 원자력 낙관주의 역시 ‘핵에너지’나 ‘핵발전’과 같은 혐오스럽고 불편한 이름 대신 ‘원자력’이나 ‘원전’이라는 안전하고 깨끗한 이름으로 불리는 특수한 에너지 상품의 생산 및 사회적 유통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물신숭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물신숭배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핵심인 가상 또는 외양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대중들이 핵발전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는 태도를 ‘물신주의적 믿음’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신학적으로나 종교학적으로 어떠한 의의를 갖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제5절에서는 핵발전의 ‘경제성’ 담론에 대중들이 물신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까닭은 사실상 그것이 대중들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 및 환상에 강하게 조응하기 때문임을 주장했다. 핵에 관한 대중적 수용성, 또는 원자력 낙관주의가 발전(發展)을 둘러싼 대중의 강력한 욕망과 환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핵발전 중심의 에너지정책이 계속해서 논쟁을 야기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핵발전이 물신주의적 믿음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물신주의적 믿음’의 한 형태로서 원자력 낙관주의는 발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낸 ‘객관적 사유형태’이자 ‘필연적 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였다. 발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구조화하고 있는 현재의 사회적 관계를 변혁하지 않는 이상 대중들의 물신화된 원자력 낙관주의 역시 결코 제거될 수 없음을 역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