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16일 미국 로스앨러모스에서 인류 최초의 핵 실험인 ‘트리니티(trinity)’ 가 성공한 이래 인류는, 나아가 지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핵 시대의 인간은 모두가 핵에너지의 잠재적 영향권 아래 들어가 있지만, 핵에너지에 대한 일반인의 지식은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감으로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인 핵에너지의 영향력을 신체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피폭자들’이다. 핵 시대가 열린 1945년에 이미 한국인들의 핵 경험이 시작되었다. 곧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수만 명의 한국인들이 원자폭탄에 피폭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공식적으로 기념되는 장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핵 경험 및 그에 대한 기억은 일관되게 배제되면서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의 핵 경험과 기억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업’으로 희석되어왔을 뿐이다.
이러한 외면과 배제의 경향은 단지 원폭피해자들에게 국한되어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는 피폭의 기억이 일관되게 봉인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핵’과 관련해서는 개인적으로 기억되는 것과 사회적으로 공적 영역에서 기념되는 것이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핵에 관한 사회적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에도 기억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 글에서 나는 한국인의 핵 경험과 관련해서 기억의 정치가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해왔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본문의 II장에서는 핵의 매혹과 공포의 기억이 생산, 유포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III장에서는 고통의 기억과 대립되는 다른 기억을 생성하고 기념함으로써 상황의 무참함에 대한 감각을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리는 시스템을 ‘핵 시대의 희생제의’로 명명하고, 계속 희생물을 필요로 하고 또 희생물의 고통을 요구하면서도 이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