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폭탄을 실제로 사용한 국가는 지금까지 미국밖에 없다. 물론 핵폭탄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그래서 2차 세계 대전 전후 미국의 핵 정책 변화는 주요한 연구 주제다. 전 세계가 그 변화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핵의 평화적 이용을 돕는다는 미국의 정책으로 1959년 한국에 핵반응 장비가 미국에서 도입되었다. 그 이후 한국에 핵발전소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핵 정책은 한국 정부의 핵 정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이 글에서는 2차 대전 시기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핵심 인물 중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과학자문관이던 배니바 부시(Vannevar Bush)에 주목한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7월에 《과학: 끝없는 프론티어(Science: The Endless Frontier)》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군사 연구를 위한 독립 기관 설립, 핵무기 개발에 기여한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 확대 등 전후 미국의 핵 정책과 과학기술 지원에 관한 포괄적인 제안을 담고 있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이 끝나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사라지자, 미국은 핵을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하는 ‘핵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을 제안했다. 1953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를 발표했다. 하지만 1954년 3월 미국은 핵실험을 시행하면서 이 제안이 이중적인 정책이었음이 드러났다. 국제적으로는 다른 국가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는 대신 핵발전 기술을 전수했다. 반면 미국 내에서는 핵무기 개발을 지속해 핵무기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핵에너지의 오용은 곧바로 인류의 종말이라는 시나리오가 소설과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사람들의 생각에 굳어져 있다. 핵 때문에 세계가 끝장날 수도 있다는 2차 대전 전후 상황에서 바네바 부시의 보고서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은 핵의 평화적 이용을 제안했다. 이 글에서는 부시의 보고서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문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정치적 의제가 지금의 한국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검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