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왕의 유토피아, 베르사유
정 동 준
본 논문의 목적은 루이 14세가 어떻게 절대군주정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1559년부터 30년 동안 3명의 프랑스 군주들이 파리 또는 파리 인근에서 살해당하였다. 국왕의 사망 뒤에는 어김없이 왕좌에 오른 어린 아들을 앞세운 황후의 섭정이 뒤따랐다. 섭정은 콘치니, 리슐리외, 마자랭과 같은 재상들의 지원 아래에 ㅇ유지되었다. 이런 이유로 루이 14세는 오랫동안 존재감 없는 국왕으로 남아 있었으며, 18년 동안 관심이나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왕권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소는 파리, 파리의 귀족들 그리고 파리 시민들이었다. 과거 국왕들의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국왕이 머무는 튈르리 왕궁은 귀족들의 저택들로 포위되었다. 프롱드 난 사이에 파리의 귀족들은 폭동을 부추기거나 군대를 동원하여 왕권을 위협하였다. 프롱드 난을 겪으면서 국왕은 자신이 직접 통치를 하겠다는 친정(親政)의 의지를 굳혔다.
1661년 마자랭 재상이 사망하자, 루이 16세는 재상을 임명하지 않았고, 친정을 선언하였다. 그가 통치자로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콜베르의 도움을 받아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귀족인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를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국왕은 파리를 벗어난 곳에 정치, 문화, 예술을 위한 새로운 공간 - 그 공간의 중심에 국왕 자신이 위치하는 –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푸케의 보르비콩트 성(城)과 정원을 건설하는 데에 참석한 르 노트르, 르 보, 르 브룅을 소환하여, 베르사유의 건설에 투입하였다.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양식을 반영하여, 베르사유에 자신의 유토피아를 수립하였다. 베르사유의 왕궁과 정원의 건설은 자신과 귀족들을 차별화시키려는 그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