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 칸의 <아버지 돌아오다>는 1920년대에 이미 한국(조선)에 유입되어 공연되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아버지 돌아오다>가 교육(수업) 텍스트로 선정되었지만, 이내 공연 대본으로 변모하여 연극으로 제작되었고, 지방 순회공연을 통해 부산과 대구 등지에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이후, <아버지 돌아오다>는 1927년 취성좌에 의해 ‘신극회’ 공연 레퍼토리로 선정되었고, 취성좌의 후신 격인 조선연극사에서도 공연 예제로 선택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당시의 대표 극단 격인 태양극장과 동양극장이 이 작품을 주요 레퍼토리로 다루었고, 동양극장의 후신 격인 아랑은 1940년대 공연작으로 선택한 바 있다. 이러한 공연 수용사적 맥락은 일정한 연맥을 형성하면서, 이 작품의 인지도를 조선 전역에 확산시켰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조선의 극단은 <아버지 돌아오다>를 다양한 방식으로 공연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 작품은 일본 작품의 한국 공연에서 주요한 이정표를 남기곤 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아버지 돌아오다>의 공연사적 흐름을 조사하면서, 아울러 당시 공연이 가진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고자 했다.菊池寬の<父帰る>は、1920年代には既に韓国(朝鮮)に流入して公演し始めた。そもそもは、<父帰る>教育(授業)のテキストに選ばれたが、通常の公演の台本に変貌して演劇で製作され、地方巡回公演を通じて、釜山と大邱などに知られているに至った。以降、<父帰る>は1927年の聚星座で新グクフェ公演レパートリーに選ばれ、聚星座の後身格朝鮮演劇舍も公演レパートリーに選ばれた。1930年代半ばに入り、当時の代表極端格太陽劇場と東洋劇場が<父帰る>を主なレパートリーで公演し、東洋劇場の後身格阿娘が1940年代共演作として選択した。これらの公演収容私的な文脈は、一定の流れを形成しながら、この作品の認知度を朝鮮全域に拡散させた。実際に植民地時代の朝鮮の劇団は<父帰る>をさまざまな方法で公演し、これにより、菊池寬のこの作品は、日本の作品の国内公演で主要なマイルストーンを打ち立てた。本研究では、このような<父帰る>の公演私的流れを調査しながら、併せて当時の公演が持つ特性と意義を探る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