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게발트(Gewalt)는 우리말 권력 또는 폭력으로도 번역되는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전자가 합법적으로 승인된 폭력으로서 공권력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이에 맞서거나 저항하는 비합법적 대항폭력을 통칭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폭력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게발트에 내재한 양가적 속성을 준거점으로 국가권력을 제도화된 폭력으로 고발하는 도발적 문제제기를 자극하는 한편, 대항폭력에 대한 이론적ㆍ실천적 옹호의 출발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은 국가권력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가장한 폭력에 불과한 것이기에, 이에 맞서는 것 또한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인식은 모든 폭력을 금지하거나 예방하는 차원에서 더 큰 폭력을 불러 올 수 있는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폭력에 대한 윤리적 가치판단에 입각해 어떠한 종류의 폭력도 불허해야 한다는 비폭력에의 호소는 대항폭력에 내재한 이 순환적 곤경으로부터 도출되는 자연적 귀결인 듯 보인다. ‘폭력이냐, 권력이냐’, ‘대항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양자택일적 물음은 게발트에 내재한 이 양가성의 주위를 겉돌 뿐, 폭력에 대한 어떤 명쾌한 답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게발트의 양가적 속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대항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이원적 대립 구도 속에서 논의되어 왔던 폭력 담론을 재조명해보려는 목적을 갖는다. 프랑스 철학자 에띠엔 발리바르(É. Balibar)는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반(反)폭력’이라는 새로운 기호를 종래의 폭력담론에 기입함으로써 폭력의 논의 지형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한다. 폭력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의 관점에서 이론적ㆍ실천적으로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은 폭력적 현실을 맹목적으로 인준하는 부정적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또한 국가권력을 폭력으로 환원하고, 이에 맞서는 대항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논변은 국가권력 또는 정치에 대한 편향된 이해에 근거하는 것으로 마땅히 기각되어야 한다. 대항폭력도 비폭력도 아닌 제3의 길로서 ‘반폭력의 정치’를 주장하는 발리바르가 보기에 오늘날 전지구적 규모로 분출되고 있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가능한 처방이란 국가의 문명화 또는 혁명의 문명화를 통해 정치를 재발명하는 것뿐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시빌리테의 정치라고 명명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논의를 담고 있다. 이 글은 우선 맑스적 관점에서 폭력이 역사적ㆍ구조적 맥락에서 이해된다는 것을 밝히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난제들을 제시한다. 이 글의 3장은 이와 같은 맑스의 사유 안에 내재한 몇 가지 난제들에 입각하여 맑스-엥겔스 폭력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비판을 소개한다. 발리바르에 의하면, 오늘날의 현실정치에 대한 맑스주의의 무능은, 정치 또는 국가의 문제를 폭력으로 환원한 협소한 시각틀에서 기인한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정치가 폭력을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폭력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 이론은 정치와 폭력의 이 비극적이고 변증법적인 연관관계를 사유하는데 무능했다. 이 글의 4장은 폭력에 대한 맑스적 관점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ㆍ실천적 기획으로서 발리바르의 시빌리테의 정치를 소개한다. 발리바르는 평등-자유 명제를 통해 인권선언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구축하고, 이로부터 ‘폭력의 문명화’ 혹은 ‘혁명의 문명화’를 오늘날 현실정치가 직면한 한계를 돌파할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에 의하면 폭력은 정치도, 정치적 행위도 아니다. 폭력은 정치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가 폭력을 잉태하고 있다면, 우리는 정치에 내재한 폭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실천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정치를 발명해야 한다는 발리바르 반폭력론의 요체다. 끝으로 이 글은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분출되고 있는 극단적인 폭력의 현실 속에서 발리바르의 반폭력론이 어떤 실천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진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