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극로의 어문 연구 활동과 어문 운동의 결과물을 가지고 이것이 국어 연구, 표준적인 한국어의 성립과 발전, 국어사전의 편찬 등에 어떻게 이바지하였는지를 생각하여 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국어사전의 편찬과 그의 연구가 어떤 관련성을 맺는 것인지를 살펴서 사전 편찬에 끼친 그의 공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극로는 외국 생활을 하면서 국어가 민족의 생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서 국어사전을 만들어야 하고, 한글 중심으로 표기를 하고 철자법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고, 귀국 이후의 그의 활동은 이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실제로 그는 음운, 문법, 표기법, 사전 편찬에 관한 연구에 주로 매진하였는데, 이런 연구는 ‘음운 →철자법→ 표준어→문법(단어 중심)→사전 편찬’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즉 여러 연구 성과가 사전 편찬에 관한 연구와 사전 편찬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으로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29년 1년에 朝鮮語硏究會에 입회한 후 그해 10월에 朝鮮語辭典編纂會 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위원 21명 중의 한 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상무위원 겸 편집부 상무의 역할도 맡아 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이후 1931년 1월 6일 조선어사전편찬회 위원회에서 규약을 수정하고 위원을 증원하며 회장으로 李祐植을 선출하였는데, 이때 자신은 간사장의 역할을 하면서 사전 편찬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이를 보면 그는 사전 편찬과 이에 필요한 재정 확보를 하는 데에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행적을 앞에서의 그의 연구와 결부지어 보면, 이극로는 사전 편찬을 실제로 이끌어 가고 자금을 마련하면서, 그 자신이 사전 집필을 위한 큰 틀과 구체적 내용을 고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극로는 1947년에 『조선말 큰 사전』 제1권을 발행한 이듬해인 1948년에 越北을 하였는데, 월북의 목적은 金枓奉의 제안에 따라 북쪽의 조선말 사전을 편찬하여 남북의 분단으로 야기될 언어의 분단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월북 후 이극로는 조선어문연구회의 위원장이 되어 ①조선어 문법의 편수 간행, ②조선어 사전의 편찬 간행, ③조선 어문 연구 잡지의 간행, ④조선 어문 연구 논문집의 간행, ⑤조선 어문에 대한 특별 강연회의 개최 등의 북한의 어문 정책을 주도하였다. 이런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월북을 하였다는 이유로 남북의 언어 통일을 위하여 사전 편찬과 문법 연구에 집중한 업적이 평가 절하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보다는 민족의 통일과 언어의 분단을 막기 위해 어려운 결심을 한 그 정신과 용기를 높이 살 필요가 있으며, 그의 행적은 그가 1920년대에부터 보여 온 행적과의 관련성 속에서 고찰하여 보고 여기에서 얻은 결과물들을 가지고서 냉철하게 그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