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은 송대 학자인 호인(胡寅, 1098~1156)이 지은 『讀史管見』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었는지에 대해 살핀 글이다.
이 저술은 송대 성리학의 발전 과정, 그리고 성리학적 역사관의 성립 과정 속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조선에 수용된 이후 지식인들의 역사관 형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논자들에 의해 이 저술이 양면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날카로운 역사 인식과 평론을 보여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지나치게 냉정하고 엄혹할 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朱子는 역사관 형성에 있어서 이 저술의 영향을 깊게 입기도 하였고 호인의 인물됨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또 반면에 사적인 감정에 기인한 저술이라는 혹평이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가 병존한다는 사실은 이 저술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저술이 조선에 끼친 영향력은 제법 크다. 수용 초기인 고려말 조선초에는 호인의 견해가 역사 논평의 정설로 인정받은 실례를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經筵 자리를 통해 역사의 성패를 논할 때에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저술은 典據의 의미가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후기로 갈수록 『독사관견』은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通說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또 반대급부로 주요한 반박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역시 『독사관견』의 위상을 가늠케 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