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조선시대 최초로 국가의례 길례로 행해진 왕의 사친(私親) 의례였던 의묘(懿廟) 의례 형성과정에서부터 이후 종묘에 부묘되기 전까지 축문(祝文) 호칭을 둘러싼 주요 쟁점과 명분을 살펴보았다.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종(成宗)이 종묘 의례의 축문에 부자(父子) 관계로 설정된 상황에서 원칙적으로는 성종의 생부,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1457, 덕종(德宗)으로 추증됨]를 아버지로 제사지낼 수 없었다. 의묘 의례의 축문 호칭은 성종과 의경세자를 조카(姪)와 큰아버지(伯考)의 관계로 설정하였다. 대통(大統)이라는 기존 질서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사친에 대한 정(情)도 온전하게 하기 위한 절충안이었다.
의경세자를 의묘에서 종묘로 부묘하는 문제에서 주요 쟁점이자 최우선적인 해결과제는 축문 호칭이었다. 축문 호칭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질서를 정리해주는 위격을 의미하며 이것을 표명하고 규범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묘부묘 논의에서 가장 쟁점이 된 실제적인 문제는 축문 호칭의 관계설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의묘 의례에서처럼 조카와 큰아버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종묘에 부묘되었다. 덕종으로 추존되어 종묘에 부묘된 의경세자는 성종 개인의 사친으로서가 아니라 왕실 조상신으로 이후 왕대에도 지속적으로 봉안되었다.
의묘 의례 형성과정에서 종묘부묘 전까지 축문 호칭을 둘러싼 논의를 통해서 왕실 조상신의 이중적인 모델인 이념적인 왕실 조상신과 정서적인 왕실 조상신이라는 특징을 볼 수 있다. 의묘 의례는 유교 조상신 의례의 명분, 보본반시가 구체적으로는 생물학적 보본반시이자 정(情, 私情)의 명분이 수용되었다. 사친의례에 대한 명백한 법규가 없던 조선 초기에 형성된 의묘 의례와 부자(父子) 관계로 설정되지 않은 축문 호칭은 이후 왕대에 조선 왕실의 전례로 삼아졌다. 성종 대 당시 생물학적 보본반시(報本反始)를 명분 으로 한 사친의례의 형성과 축문 호칭은 당시 조상신에 대한 관념과 실천 양상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서 여타의 유교의 신들과 다른 조상신의 특징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