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동아시아는 ‘서세동점’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인 ‘천하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근대세계시스템’에 강제적으로 편입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서세동점’에 의한 위기감과 세계관의 급격한 변화는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서세동점’에 대항・극복하려고 하는 사상적 동향으로 토쿠가와 일본에서 후기미토학이 나타났다. 후기미토학은 미토번의「대일본사」편찬작업에서 출발한 미토학이 막말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에 즈음하여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동향 중에 등장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후기미토학 사상의 대표적인 글이자 막말 존황양이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아이자와 야스시의「신론」은 ‘국체’를 강조하여 이후 메이지유신으로 성립된 천황제국가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자와의 사상은 유교가 그 근간이며 막번제적 군신질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군주에 대한 직접적 충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자와가 말하는 국체론은 자기의 직접적인 군주에 대한 충성을 다하는 것이 결국 천황에 대한 충성이라는 논리였다. 이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제사 체계를 구상하여 서양 기독교세력으로 향할 수 있는 민심을 끌어들여 막번체제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자와는 대외적 위기의 대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을 통일하는 것이며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백성에 대한 교화 즉 ‘정교일치’에 입각한 ‘교화정치’를 제시하고 있다. 후기미토학의 제사 구상은 19세기 아이자와 당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이후 메이지 국가의 국가신도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미토학과 아이자와의 사상은 후일 외부에 의한 위기상황을 교육이나 의례를 통해서 ‘국민’을 단결시키고 ‘혈통에 입각한 만세일계의 천황신화’를 만들어 극복하려고 한 메이지 국가의 천황제와 국체론에 흡수되어 일본의 ‘근대 국민국가적 언설’의 원류를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