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러시아혁명을 전후한 시기, 상이한 통치체제 속에서 유지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검열’의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1905년 ‘10월 선언(Октябрьский манифест)’에 의해 사전검열이 폐지된 시기로부터 혁명 이후 볼셰비키 체제에서 글라블리트(Главлит)가 등장하는 1922년까지 포르노그래피와 관련된 검열의 대표적 사례들을 통해 러시아 국가검열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는 혁명기의 혼란 속에서도 반대자에 대한 억압이나 통제를 촉진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을 전후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검열의 입장은 체제의 상이성에 따라 대별된다. 전제의 검열이 포르노그래피로부터 취약한 인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한 ‘가부장적 후견주의’의 입장이었다면, 볼셰비키의 검열은 훨씬 더 정치화되어 이념적 노선에 종속되었다. 이와 같은 포르노그래피 검열의 가변성은 아르치바예프(М.П. Арцыбашев), 베르비츠카야(А.А. Вербицкая), 필리냐크(Б.А. Пильняк)의 사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검열의 판정 기준은 일관되지 않았고, 정치체제와 사회적 상황의 변화와 연계되었다. 이로 인해 동일한 저작이 용인되거나 혹은 거부되었다. 결국, 검열은 사회여론 및 정보의 생산주체인 출판과 국가 통치의 수행주체로서 정권이라는 두 영역의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통치의 궁극적 목적이 체제의 안정적 유지와 발전에 있다고 전제할 때, 러시아 국가검열의 본질은 혁명기의 통치 목적을 실현하는 핵심 기제로서 기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