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제국주의 대 무산자계급·피압박민족·피압박 국가라는 대립구도 하에 사회주의가 서로 연동되어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결합시켜나가는 추세에 있었다. 조선의 사회주의 수용은 19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문건은 1920년 천도교 잡지 『개벽』에서 비롯되었다. 개벽사의 중국특파원 역할을 했던 이동곡은 중국의 신문화운동과 사회혁명,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국내에 소개했고, 김기전과 이돈화는 조선적 처지와 상황에 맞게 중국 사회혁명과 러시아 사회주의를 변용시켜나갔다. 농민이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노동자가 소수인 상황에서 조선의 계급운동은 농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조선청년총동맹을 운동의 주체로 삼는 노농운동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리고 계급의식의 원천을 갑오동학혁명에서 찾았다. 계급의식이란 처음부터 혁명적 수단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내천주의로 들어가 창조정신과 상호연대의 사상으로 형성되는 보편의식에 기초함을 강조했다. 또한 무산청년동맹인 조선청년총동맹을 조선의 운동주체로 삼았고, ‘사람성 무궁’에 뿌리박는 사상적 단결과 전체 인민의 의사에 의한 문화주의정치를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최후의 혁명은 조선에서 나올 것이라 했고, 그 혁명의 원리는 만인이 공명할 ‘개벽의 대이상(大理想)’에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