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월북했던 김용준은 1950-60년대 북한미술계의 중심부에서 사회주의 사실주의 민족미술의 형식으로서 조선화를 내세우며, 조선화의 형식을 개변(改變)하고자 했다. 1950년대 중반 ‘조선화’라는 용어의 사용을 미술계에 제기했던 그는 과학원 소속의 연구자로서 고구려 고분벽화와 김홍도 등의 미술사 연구를 진행하며 그 성과를 집약해 연구서들을 출간했다.
월북 직후에는 북한 미술계의 동향에 따라 사회주의 사실주의 유화를 창작했지만, 1950년대 중반 조선화 화가로 다시 전향했다. 조선화 화가로서 각종 전람회에 출품했던 1950년대 중·후반 그의 작품들은 인물·풍경·화조 등 다양한 소재로 필획이 살아있는 수묵담채 화풍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57년 조선화분과 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그는 〈춤〉으로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1위를 수상함으로써 북한회화의 위상을 높였다.
김용준은 1960년 이후 채색화 담론의 장에서 조선화 화가들에게 다양한 채색을 구사해 조선화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키기를 독려했고, 이에 발맞춰 조선화에 적용시킬 창작기법과 채색기법을 이론으로 재정리했다. 아울러 조선화 화가들에게 요구되었던 천리마 시대에 걸맞은 ‘현실의 약동하는 기상’과 ‘혁명투사들의 투쟁 장면’을 주제로 채택해 채색화로 그려내면서 미술계의 변화에 부응했다.
그러나 조선화의 형식이 ‘몰골 진채’로 이양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김용준은 화조화 분야에서 만큼은 전통 수묵화의 사의성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다. 즉, 김용준은 당시 미술 형식의 변화에 부응하면서도 월북 이전부터 추구해왔던 필획과 먹색의 조화를 근간으로 하는 전통 문인화풍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