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초기 조선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테제인 ‘사회주의적 내용과 민족적 형식’을 어떻게 반영할지 여러 담론이 공존했다.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조선화는 리얼리즘의 범주에 적용되지 않고 ‘낡은 부르주아의 사상’으로 정의 되었다. 그러나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함께 미술계의 해빙기는 전통적인 화풍의 조선화가 허락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석호는 사의적인 화풍을 지속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 중소분쟁 이후 북한의 자주노선은 ‘주체미술’을 탄생시키며 사의적인 화풍을 곧 ‘수정주의’로 지목했다. 따라서 1960년대 채색화를 중시하는 당의 정책에 따라 이석호는 사실적이며 화려한 색채를 구사했다.
월북 이후 이석호는 문인화풍이 허락되지 않던 1950년대 초반에는 비교적 사실적인 화풍을 시도했다. 그러나 1956년 미술계의 해빙기와 베트남 방문 이후의 개인전에서 서예적이며 거친 필획의 발묵법을 이용해 사의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의성이 곧사실적일 수 있다는 의견을 가졌던 김용준의 지지와 함께 화단에서 조선화의 거두로 인정받았다. 이석호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산수화, 화조화를 그린 후 항일무장투쟁 주제라는 의미를 부여했으며, 감각적이면서 사의적인 필묵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주체미술의 대두와 함께 이석호가 주장했던 ‘먹과 다양한 채색의 조화’는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당의 정책을 받아들이고자 ‘항일혁명지’, ‘붉은 당성’, ‘조국의 자연’ 등의 주제에 화려한 색채의 화풍을 구사했다. 그 결과 먹과 채색이 조화를 이룬 조선화의 기념비작 〈소나무〉를 탄생시켰다. 이처럼 전통적인 수묵화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결합된 그의 대표작들은 이후의 조선화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