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조(李承祚, 1941-1990)는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원통 형태를 다양하게 구성한 회화 〈핵(核, Nucleus)〉 연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작가는 특유의 명징하고, 이지적이며, 계획적인 성격의 추상회화를 평생 고집스럽게 선보여 작고한 뒤엔 “우리 화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의 세계를 추구한 화가”, “논리적인 작업의 전통이나 체험이 빈약한 우리의 현대미술 속에서 더없이 이채로운 존재”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승조 회화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대체로 〈핵〉 연작에 나타나는 파이프 형상을 조국 근대화에 주력하던 한국 사회의 시대적 상징물로 바라보면서, 그의 작업을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새로운 전형을 구축한 것으로 여기거나, 한국 옵아트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간주한다. 또 1970년대 이후 이승조 작품의 변화를 그룹 ‘AG’의 개념미술 및 현상학에의 관심과 연계해 해석하거나, 그를 모노크롬 추상회화의 태동과 형성을 주도한 주요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연구들에서 정작 이승조의 〈핵〉 연작의 어떤 특징이 당대의 다른 기하학적 추상회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는지, 한국적 옵아트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구체 적이고 상세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승조의 예술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 특징을 특정 활동 단체나 회화 양식의 성격에 기대지 않고 고찰해 그 미술사적 의의를 찾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 본 연구는 이승조의 회화를 당대의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맥락 속에 자리하는 시각적 지표로 간주하고, 그의 작품뿐 아니라 1960년대 이후 한국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역사 전반에 대한 기존 견해를 교정할 기회를 마련해 보고자 했다. 이로써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회화, 옵아트의 시발점이 된 이승조의 〈핵〉 연작이 《국전》, 재야의 전위 단체 ‘오리진’, 산업디자인의 영역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했음을, 그리하여 태생적으로 전위미술과 아카데미즘 미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 이승조의 〈핵〉 연작을 구상, 기하학적 추상, 모노크롬 추상, 그리고 극사실회화의 어느 한 범주에만 국한해 이해할 수 없음도 피력했다. 본 연구는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순혈주의와 진화론에 기반했던 기존 한국 현대미술사의 기술 방식을 극복하고, 기하학적 추상회화와 이승조 회화를 고찰할수 있는 새로운 미술사 방법론을 모색해 보고자 했다. 그 결과 구상에서 출발해 추상으로, 그리고 다시 극사실에 도달하기까지, 작가 이승조의 목표는 오로지 회화에 서의 시각적 문제의 추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승조의 〈핵〉 연작은 미술사에서 모더니즘 추상회화에 주어졌던 과업, 즉 ‘매체의 저항을 압도해 완벽한 시각적 일루 전을 창출하는’ 일을 완수해냈는데, 이로써 우리는 그의 추상회화에서 전통이나 정신에 기대지 않은 한국적 모더니즘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