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7월에 창단된 극예술연구회는 1930년대 전반기 조선을 대표하는 연극 단체로 성장했다. 극예술연구회는 1934년 12월까지 총 7회의 정기공연과 1회의 특별공연을 선보였고, 이를 통해 조선 신극의 ‘메카’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5년에 접어들면서, 조선 연극계 안팎의 사정이 복잡해졌고, 극예술연구회는 공연작 제작 과정에서 각종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예술연구회 핵심 멤버들은 ‘액년’이라고 표현했다. 1935년 1월부터 준비되었던 제8회 정기공연은 검열 불허와, 극단 자체 역량 문제 등으로 연기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1935년 11월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시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초의 기간을 겪으면서 결국 극예술연구회는 변화된 조선 연극계의 사정과 관객의 성향 그리고 극단 경영의 수정에 대해 진지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극예술연구회는 1936년에 새로운 방침을 발표하면서 1930년대 전반기와 차별화되는 변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변화 방향은 결국 극예술연구회의 1930년대 후반기 활동의 중심 목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