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곽은 일본 에도시대에 등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창기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娼妓業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한 지역에 모아서 성매매를 하도록 하였는데, 포주는 이들 娼妓들에 대해 몸값을 지불하고 통제하면서 유곽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창기업이 번창하게 되고 유곽에 있는 창기들이 가부키나 우키요에 등의 모델이 되는 등 에도시대를 지나면서 유곽은 ‘유곽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하나의 국가적 전통문화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법령을 제정하여 근대 公娼制가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해외로 진출하면서 아시아 곳곳에 일본의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일본인이 거류지에 정착하였다. 식민지를 개척한 일본인들은 본토에서 누리던 문화를 계속하여 접하기 위해 그들이 거주하는 조계지에 일본의 문화와 제도를 이식하였다. 유곽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일본의 식민도시마다 군대, 신사와 더불어 존재할 수 있었다. 조선과 중국에 건설된 일본인 거류지에도 유곽이 건설되었다. 유곽은 건설 초기 식민지에 홀로 건너온 일본인 남성을 중심으로 하여 남성 노동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성매매를 진행하였지만, 점차 창기업이 성황을 이루면서 1920-40년대에는 식민도시 사회에 깊이 침투되어 유곽과 창기업은 도시의 대표적 유흥문화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근대 조선과 중국의 일본 식민도시에는 예외 없이 일본식 유곽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유곽을 통한 공창제도의 실시는 해외에 진출해 있는 일본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거나 지역 이익을 창출하는 것 이외에도 해외에 주둔한 일본 군대에 안전한 성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공창제도는 일본 식민당국의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고 식민지역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실시하는데 유용했을 뿐 아니라 주둔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줌으로써 제국주의적 침략을 확대하고자 하는 일본의 이익에 영합하는 사회제도라 할 수 있었다.